인크루트 결승전이 끝나자마자 독일에서 열린 ‘월드 사이버 게임즈’(WCG)에 참가하고 돌아온 송병구 선수는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빡빡한 일정에도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결승전 이야기를 꺼내자 아직도 우승의 순간이 생생한 듯 목소리가 들뜨기 시작했다.
“2:2로 아슬아슬했던 순간에 마지막 경기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하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정도로 기뻤어요. 첫 결승전에 올라 준우승을 했을 때는 막연히 ‘아쉽다’라고 생각했을 뿐 별 다른 느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결승전에 올라가는 대회마다 준우승만 하게 되니 상상하지 못할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쌓이더라고요. 자신감도 많이 떨어져 한 때는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번 결승전에서는 꼭 우승해서 제가 최고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원래 송병구 선수는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보다 매 후회없이 경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목표인 선수다. 하지만 아쉽게 계속 준우승만 차지하자 욕심이 생겼다. e-스포츠 팬들이 쓴 ‘송병구 선수는 매번 준우승만 한다’는 악플을 보고 우승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악플이 우승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그는 “이제 우승도 했으니 악플보다 선플을 보고 싶다”고 웃으면서 전했다.
말썽쟁이가 최고의 선수로 거듭나다
어릴 적 게임을 너무 좋아해 부모님을 속상하게 했던 다른 프로게이머들처럼 송병구도 어린 시절에 게임을 무척 좋아해 오락실과 PC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용돈만으로 PC방을 다니기 어려워지자 열심히 모았던 통장의 돈을 몰래 빼서 다 써버릴 정도였다.
“세뱃돈까지 저금할 정도로 열심히 모았는데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요. 그래도 그때의 열정 덕분에 프로게이머가 되었으니 후회는 없어요.”
지금은 군대에 가 있지만, “너 우승하는 거 보고 군대 가겠다”고 응원해주던 친구들도 그때 함께 게임을 하면서 친해졌다. 처음 스타크래프트를 할 때는 인간과 닮은 테란으로 시작했다. 어린 시절 스타크래프트 대회에서 늘 멋있게 우승하는 종족이 테란이었다. 정작 게임을 해보니 외계 종족인 프로토스한테 매번 지기만 했다. 프로토스를 이기기 위해 매일 고민하고 연습하다 보니 어느 순간 테란보다 프로토스에 더 빠져들었다. 연습생 때의 이런 경험이 현재 최고의 선수가 되는 밑거름이 됐다.
“예전에는 게임만 하면 거의 지기만 했어요. 연습 때도 계속 지기만 하니 과연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는지 걱정이 됐어요. ‘지면서 배운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질 때마다 더 연습하고 경기를 분석해서 강해질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지금은 자주 이기는 편이라서 다행이지만 아직도 팀에서 연습할 때는 자주 져요.”
그는 현재 삼성전자가 만든 ‘삼성 칸’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은 팀에서 군기반장 역할을 하지만 처음 팀에 들어왔을 때는 형들한테 사랑받는 귀여운 막내였다. 시간이 흘러 함께 했던 선수들이 하나둘 은퇴를 하면서 어느새 송병구 선수가 팀의 기둥이 된 것이다. 평소에는 후배에게 잘해 주지만 잘못이 있으면 따끔하게 지적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 팀의 군기반장이 되었다. 반장 역할이 부담스러운지 “동생들이 다른 사람에게 실수하고 혼나는 모습을 보기 싫다”면서 “일부러 엄하게 다루는 것인데 동생들은 잘 몰라준다”고 멋쩍게 웃는다. 아직 21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지만 팀을 위해 고민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니 더욱 ‘프로’답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야구선수에게 글러브와 야구 방망이가 있다면 프로게이머에겐 키보드와 마우스가 있다고 할 정도로 게이머에게 키보드와 마우스는 중요하다. 한 번의 실수가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키보드와 마우스에 쏟는 정성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송병구 선수가 쓰는 장비는 기대와 달리 평범하기 짝이 없다. PC방에서 많이 쓰는 ‘삼성 106키보드’와 ‘로지텍 G1 마우스’였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바꾸면 게임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비싼 기계식 키보드와 광마우스를 산 적이 있어요. 하지만 도리어 승률이 더 떨어지더라고요. 특히 기계식 키보드 특유의 키 감과 소리 때문에 연습이나 시합을 할 때 집중이 되지 않았어요. 그 뒤에도 많은 키보드와 마우스를 썼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다 팀에서 추천한 키보드를 써 봤는데 마음에 쏙 들더라고요.”
삼성 106 키보드의 장점은 튼튼한 내구성이란다. 하루 종일 키를 눌러야 하는데 오래써도 멀쩡한 것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로지텍 G1 마우스는 “남들보다 손이 커서 작은 마우스는 맞지 않아서” 쓰고 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격언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송병구 선수는 게임 외에 다른 취미 생활을 즐기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디지털 제품 구입이라고 말한다. PMP를 비롯해 MP3 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 닌텐도 DS와 PSP까지 웬만한 제품은 모두 가지고 있다. 문제는 제품을 제대로 써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 닌텐도 DS와 PSP는 사서 뜯지도 못했다. 가끔은 묵혀두었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그냥 주기도 하는데 며칠이 지나 다시 갖고 싶어져 또 구입한 적도 여러 번이다. 디지털 제품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과 다르게 실제 쇼핑이 취미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쇼핑도 무척 좋아해요. 사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사기 전에 제품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는 것이 재밌거든요. 정보만 찾다가 정작 관심이 사라져 사지 않은 것도 많아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e-스포츠가 탄생한 지 10년이 지났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결승전에 찾아와 응원을 했던 때에 견줘 지금은 열기가 많이 식었다. 색다른 경기보다 항상 비슷한 경기만 벌어지니 사람들이 쉽게 흥미를 잃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병구 선수의 우승은
남다르다. 송병구는 경기만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선수다. 그에게 이번 인크루트 스타리그 우승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꿈을 이루었다고 하기에는 아직 e-스포츠에서 이루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흔히 스타크래프트 팬들 사이에서 가을에 우승하는 프로토스는 ‘가을의 전설’이라 불린다. 송병구 선수는 지난 해 전설의 문턱에서 뒤돌아선 경험이 있다. 그리고 1년 뒤 다 쓰지 못한 전설을 완성시키면서 그와 그를 응원하는 많은 팬들의 꿈을 이루어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우승을 기다렸는지 그가 우승하자 네이버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즐겁게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힘든 시간이 있어도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한 순간만 잘하고 사라지는 선수가 아닌 항상 꾸준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노력할 테니 많이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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