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카맣게 불타버린 아이팟의 잔해가 마치 소비자의 마음 같다.
2008년 12월, PDA 동호회 사이트 ‘클리앙’에 아이팟 배터리 폭발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글에는 배터리가 폭발한 아이팟과 불에 탄 책상 사진, 그리고 ‘배터리가 터져서 아쉽다’라는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행히 글을 올린 주인공은 충전을 해놓고 다른 일을 하던 차라 폭발로 인한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당연히 애플 코리아의 A/S를 기대했지만, 애플 코리아의 입장은 달랐다. 폭발의 원인을 소비자의 실수라며 보상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피해자 김태연 씨는 “별 생각 없이 피해 보상만 받으려고 했는데 애플 코리아의 대응이 너무 무성의해서 화가 났다”며 게시판에 글을 올렸고, 이 글이 화제가 되었다.
그는 제대로 된 사고 원인을 알려주거나 보상을 하지도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애플 코리아의 서비스에 분노했다. 폭발 사고가 관심을 끌고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애플 코리아가 뒤늦게 수습에 나선 것. 그렇지만 이미 아이팟에 대한 신뢰는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세세계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애플 아이팟 나노 1세대. 배터리 폭발의 원인은 아직도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아이팟 폭발의 원인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아이팟 폭발 원인은 리튬 이온 배터리의 문제다. 리튬 이온 배터리는 값이 싸고 수명이 길어 쓰기 편하지만 열과 충격에 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다. 과열·과전압으로 인해 쉽게 폭발을 일으킨다. 리튬 이온 배터리의 위험은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왔다. 게다가 값을 내리려고 안전장치를 제거한 제품이 늘면서 폭발 위험은 더욱 커졌다. 우리가 쓰고 있는 휴대용 기기의 90%가 리튬 이온 배터리를 쓴다. 언제 폭발물로 돌변할지 모르는 흉기를 옆에 두고 생활하는 셈이다.
리튬 이온 배터리로 만든 디지털 기기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요즘, 아이팟 폭발 사건 자체는 큰 화제도 아니다. 100% 안전한 기기란 없으니 제대로 된 보상과 사과만 뒷받침된다면 뉴스와 신문에서 크게 떠들 일도 아니다. 하지만 유독 아이팟 폭발 사고가 문제가 되는 건 그동안 애플 코리아가 보여준 우리나라 소비자에 대한 태도 탓이다.
폭발한 아이팟 제품은 ‘아이팟 나노 1세대’로 모두 똑같은 종류다. 수많은 아이팟 시리즈 중 같은 종류만 연달아 폭발했다는 건 분명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애플 코리아는 폭발 원인에 대한 정확한 해명을 거부한 채 “정확한 폭발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거나 “공식적인 입장은 밝힐 수가 없다”는 말로 사건을 무마하려고만 해왔다. 더구나 폭발 사고를 일으킨 아이팟 나노 1세대는 폭발물로 돌변하는 원인이 밝혀지지도 않은 채 여전히 팔리고 있다.
아이팟 폭발사고가 우리나라에서만 발생한 건 아니다. 2007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아이팟이 폭발한 적이 있으며, 2008년에는 일본에서 여러 차례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결국 애플 재팬은 일본에서 아이팟 나노 1세대의 배터리를 모두 무상 교체해 주는 리콜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하지만 같은 위험성을 가진 제품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홈페이지에 “배터리 문제로 과열, 손상이 있을 수 있으니 폭발 위험이 있으면 문의해 도움을 받으라”는 내용의 글만 올리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애플 코리아가 소비자를 얼마나 무성의하게 대하는지는 앞의 두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이팟이 폭발한 큰 피해를 입은 김태연 씨에게 폭발 원인을 알려주기는커녕 폭발로 타버린 책상이나 이어폰에 대한 보상은 하나도 없이 새 아이팟을 주고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 폭발 사건이 신문을 떠들썩하게 장식하고 나서야 애플 코리아는 마지못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폭발 원인에 대해서는 끝까지 속 시원한 설명 없이 넘어가 버렸다.
6월에 아이팟 폭발 사고에서도 애플 코리아는 원인에 대한 설명이나 대책 마련보다는 제품을 교환해주고 사건이 커지지 않게 쉬쉬할 뿐이었다.
무섭게 부풀러 오른 전원부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
2009년 6월 초, 아이팟 동호회 사이트인 ‘위드아이팟’에 ‘아이팟 나노가 폭발했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충전기에 연결된 아이팟이 폭발한 사진과 자세한 사건 정황이 적혀 있었다. 충전 중인 아이팟에 갑자기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폭발음이 들렸고, 자세히 살펴보려고 가까이 가려던 찰나에 아이팟이 터져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아이팟이 폭발한 주위에는 불탄 자국이 남았고, 사람이 부상당할 뻔한 위험한 상황이었다.
원인이라도 밝혀야 하는 것이 도리
문제가 발생하면 애플 코리아는 매번 똑같이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겐 문제의 원인을 밝히지 않는다”는 ‘본사의 방침’에 따라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미국의 애플 본사는 기업신뢰도에서 1위를 놓치지 않는 믿을 수 있는 회사라는 평을 듣는다.
기업신뢰도 1위인 애플이 왜 우리나라에서는 ‘서비스가 형편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일까?
애플은 우리나라에서 아이팟을 홍보하기 위해 적극적인 투자를 한 적이 없다. 외국에서 소개된 자료를 우리나라 애플 마니아들이 블로그나 카페에 올려 입소문을 탄 것이 전부다. 이렇다 할 라이벌 기업이 없는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아이리버, 코원, 삼성전자 등 저마다의 장점을 내세우는 쟁쟁한 제조사들이 있기 때문에 비집고 들어오기도 쉽지 않다. 애플에게 우리나라 시장은 계륵이다. 포기하기에는 구매력과 충성도가 높지만 본격적으로 마케팅을 펼치기에는 이득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애플이 우리나라를 하찮은 시장으로 여긴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팟 터치’가 처음 출시되었을 때 한글자판이 지원되지 않아 국내 애플 마니아들의 볼멘소리가 높았고, 아이팟 기능의 핵심인 ‘아이튠즈’도 우리나라에서는 결제를 할 수 없어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애플 소비자들은 반쪽자리 아이튠즈에 만족하거나 해외 계좌를 통해 돈을 지불해야 서비스를 즐길 수 있다. 이런 문제를 몇 년 동안 꾸준하게 지적했지만 조금도 달라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니 아이팟 때문에 사고가 나더라도 제대로 된 사후처리가 불가능하다. 그나마 언론에 알려지고 시끄러워지면 뒤늦게 수습에 나설 뿐이다. 애플 코리아의 ‘배째라’식 서비스에 실망한 사람들은 계속 늘어가고 있다. 애플 아이폰이 출시된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다시 한 번 마니아들이 술렁이고 있지만 ‘소비자들을 무시해라’가 근간인 A/S 정책을 계속 고집한다면 배터리가 아니라 소비자의 불만이 언제 폭발해 애플 코리아를 공중 분해시켜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이튠즈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서비스 요금을 편법으로 결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