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문화가 되기까지 14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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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문화가 되기까지 14년의 이야기
  • PC사랑
  • 승인 2009.10.2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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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동의 시기, 1995년

어떤 일에 대해 알아보려면 그 시작부터 파고드는 것이 가장 간단하고 좋은 해결 방법이듯, 이 글 역시 <PC사랑>이 시작되었던 1995년을 전후로 어떤 게임이 게이머들과 함께 했는지 되새겨 보는 일부터 시작해 보았다. 되돌아보니, 1995년을 전후로 PC 게임의 역사에서 ‘태동’이라 부를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

일단 국산 게임의 ‘태동’을 말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의 국산 게임들은 <그날이 오면> 등 소수 게임 외에는 큰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1995년을 전후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게임들이 조금씩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게임계의 오랜 맞수로 기억되는 소프트맥스와 손노리의 게임들도 이때부터 본격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했는데, 당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다크사이드 스토리>로 이미 많은 팬들을 확보했던 손노리의 뒤를 <스카이 앤 리카>와 <창세기전 1>을 출시한 소프트맥스가 따라가는 모양새라고 할 수 있다.

1995년에 출시된 외국 게임 개발사 사이에서도 이런 맞수 관계가 발생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많은 게임 마니아들을 거느린 블리자드와 웨스트우드가 각기 <워크래프트 II: 어둠의 물결>과 <커맨드 앤 컨커: 타이베리안 돈>을 나란히 출시한 것이다. 두 게임 모두 세계적으로 흥행했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이 시기는 웨스트우드가 앞서가고, 블리자드가 뒤를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이후 몇 년간 블리자드와 웨스트우드는 전략 시뮬레이션과 액션 RPG 등을 비슷한 시기에 출시하며 경쟁하게 된다.

그러나 게임 타이틀의 출시보다 PC 게임에 몇 배 더 큰 영향을 미친 1995년의 사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윈도 95의 출시다. 도스와 윈도를 함께 쓰던 윈도 3.1까지만 해도 도스 이용자가 더 많았기 때문에 개발자들은 도스 환경에서 게임을 만들고 게이머들 역시 도스에서 게임을 즐겼지만 윈도 95부터는 게임의 개발과 작동 환경이 모두 윈도라는 새로운 기반으로 넘어갔다. 또 텍스트 기반 명령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컴퓨터 이용자만이 게임을 즐길 수 있던 시기에서, 명령어를 몰라도 윈도 바탕화면의 아이콘을 클릭하는 것만으로 게임을 실행할 수 있게 되면서 ‘대중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윈도 95는 도스 시대의 끝을 알리는 동시에 PC게임 대중화를 이끌어냈다.

윈도 95 게임 대중화 앞당겨

윈도를 만난 PC 게임들은 더욱 화려해지고, 점점 다채로워지기 시작했다. 1997년 이후에는 도스 기반의 신작 게임은 <포가튼 사가>와 같은 몇몇 작품 외에는 점점 보기 어렵게 되었고, 그 자리를 <카르마>처럼 3D 효과를 더하거나 폴리곤을 쓴 게임들이 채워 나갔다.

게임이 2D에서 3D로 발전하게 된 원동력으로, 윈도 95라는 운영 체제 외에도 또 하나의 ‘태동’인 2D/3D 겸용 그래픽카드의 힘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게임을 하던 이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밀레니엄 시리즈(Matrox), 새비지(S3), Riva TNT(엔비디아) 등의 그래픽카드가 1995년부터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2D/3D 그래픽카드는 3dfx사가 선보인 부두(Voodoo)의 뛰어난 성능에 추월당했다. 부두의 3D 성능은 다른 2D/3D 겸용 제품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우월했고, PC 게임에서 3D를 부드럽게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안티 앨리어싱(anti-aliasing) 등의 효과까지 지원했다. 부두와 같은 3D 전용 그래픽카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 ‘3D 가속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3D를 지원하지 않는 그래픽카드에 이를 추가로 달아 쓰는 일이 많았고, 이 시기 부두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게이머들에게는 자랑거리가 될 정도였다.

역사에 남을 만한 게임들의 등장과 3D 지원 그래픽카드의 탄생, 윈도 95의 출시 등 게임 산업 안팎에서 여러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에 1995년 즈음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바로 ‘태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두(VooDoo) 그래픽카드는 부의 상징이었다.

소프트맥스 그리고 손노리
1995년 이후 점점 많은 게임이 나오면서 출시 시기가 겹친 게임들이 선의의 경쟁을 하는 일도 빈번해졌다. 이런 경쟁 관계를 이야기할 때 때로는 대한민국 게임계를 이끈 쌍두마차로, 때로는 ‘유일한 맞수’로 회자되면서 다른 경쟁 사례와는 달리 팬들까지 대립했던 두 게임사와 그들이 출시한 게임 이야기는 절대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소프트맥스와 손노리, 손노리와 소프트맥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앞서 짧게 말한 것처럼 두 회사 중 게이머에게 자신의 존재를 먼저 알린 게임사는 손노리였다. 1994년 7월 손노리가 출시한 RPG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RPG로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RPG가 주류 장르로 자리 잡도록 만드는 기초를 다진 게임이기도 했다. 손노리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성공으로 제1회 한국게임대상과 제1회 신소프트웨어 대상을 수상하는 등 상업적 성공과 동시에 작품성까지 인정받았으며, 손노리의 골수팬들이 생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손노리는 화제작 <다크사이드 스토리>로 게이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어스토니시아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주인공 로이드, 일레느를 비롯해 모험에 참여하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와 가상 세계의 설정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줄거리 자체를 즐기는 골수팬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게임 내적으로는 손노리 특유의 재미 요소로 자리 잡은 ‘패스맨’이 등장하기도 했다. ‘패스맨’은 패키지 게임의 시대 내내 기승을 부렸던 불법복제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서, 게임 도중 암호표를 입력해야만 계속 게임이 진행된다. 때문에 흥미를 돋우는 장치로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암호표까지 복사/스캔하는 자(?)들로 인해 큰 효과도 없었다.


GS와 이올린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탄탄한 줄거리로 고정팬 확보

반면 사업 초기에 <탄생>과 같은 일본 게임을 수입해서 판매했던 소프트맥스는 약간 늦게 성공을 거둔다. 1994년부터 <리크니스>, <스카이 앤 리카> 등을 만들었으나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소프트맥스가 상업적 성공과 아울러 고정팬을 창출해 낸 것은 1995년 12월 출시된 <창세기전 1>부터다. 그리고 1년 뒤인 1996년 12월 <창세기전 2: 회색의 잔영>은 출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소프트맥스는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개발사로 각광받는다.

<창세기전 2>는 안타리아 대륙을 양분한 팬드래건 왕국과 게이시르 제국의 대립 사이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 간에 얽힌 갈등과 숨겨진 여러 반전 요소들, 등장인물에 신비로운 매력을 불어넣은 김진 화백의 일러스트, 그리고 소프트맥스만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명품 시나리오가 결합된 작품이었다. 또 <창세기전 1>에서 불완전하게 끝맺었던 시나리오를 마무리하면 전작의 결말을 아쉬워하던 게이머에게 만족을 안기기도 앴다. 당시에 우리나라에 출시된 RPG 중 최고의 인기를 끌었고, 게임성도 인정받아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소프트맥스가 <창세기전 2>의 성공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때, 손노리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외전에 해당하는 RPG <포가튼 사가>를 제작하고 있었다. <포가튼 사가>는 이른바 ‘프리 시나리오’를 채택한 RPG였다. 메인 스토리와 최종 보스, 결말은 있었지만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백여 개가 넘는 이벤트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주인공과 동료의 성별, 직업에 따라 같은 이벤트도 줄거리가 달라지는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포가튼 사가>의 도입 부분에는 주인공 일행이 술집에서 속임수에 걸려 모든 장비를 도난당하고, 그 상태로 게임을 시작하는 이벤트가 있는데, 일행 중 도둑이 있을 경우에는 자신들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다른 모험자들의 장비를 훔쳐서 게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도둑이 없는 경우에는 그냥 맨몸(!)으로 이후의 시나리오를 진행해야 했다.


<어스토>의 리메이크판에서도 패스맨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RPG의 전성 시대  
 
<포가튼 사가>는 고도의 완성도를 요하는 프리 시나리오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출시를 미루다가 유통사와 계약문제로 인해 1997년 11월 미완성 상태로 출시되었다. 하지만 버그로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했으며 10여 차례 이상 패치를 거친 다음에야 어느 정도 플레이가 가능해졌으니 게이머들의 기대는 몇 배의 실망으로 변하고 말았다. 손노리의 골수팬들도 게임명에 비속어까지 포함시켜 부를 만큼 격렬하게 분노했다. 그런 와중에도 다행히 <포가튼 사가>는 화제를 양산하며 상업적 이익을 거두는 데에는 성공했다.

포가튼 사가의 후폭풍으로 홍역을 앓던 손노리와 달리, 창세기전 1, 2 시절의 도스 기반 도트 그래픽에서 완전히 탈피한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과 육성 시뮬레이션 요소를 더한 후속작 <창세기전 외전 2: 템페스트> 등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두 게임은 각각 외국의 고전 소설인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템페스트>를 모티브로 하여 안타리아 대륙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으며, 일본인 일러스트레이터를 기용해 전작과는 차별화된 느낌을 주었고, 멀티 엔딩 시스템이라는 닮은 점을 지니고 있었다.

두 외전은 아쉬움도 컸는데, <서풍의 광시곡>은 게임의 진행이 매우 지루하고 벌여 놓은 설정이나 세계의 크기에 비해 구현된 부분이 적다는 비판을 받았고, <템페스트>는 치명적 버그로 탓에 게임이 출시된 후 약 1주일 정도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이 마비될 정도의 몸살을 앓았다. <템페스트>가 완성도 지적을 받게 된 것은 12월에 게임을 출시하여 게임사의 한 해 매출을 증가시키려는 사업적 의도도 있었지만, 원래 창세기전의 다음 시리즈를 제작하기 전에 쉬어가는 의미로 개발을 시작한 가벼운 프로젝트였다가 갑작스럽게 외전 프로젝트로 변경되면서 완성도가 떨어진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소프트맥스는 두 편의 외전을 제작하면서 벌어진 시행착오들을 매조지해 나가며 <창세기전>이라는 브랜드를 더욱 가치 있는 유산으로 만들었고, 대한민국 최고 인기 게임 개발사의 자리도 굳건히 지켜냈다.

1999년 손노리는 <강철제국>이라는 턴제 전략 게임을 내놓았는데 게이머가 용병단을 운영해 막대한 부채를 일정 시간 내에 모두 상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특이한 소재의 게임이었다. 또 <강철제국>을 출시할 당시  ‘버그 발견시 총살’ 등의 표어가 적힌 사무실을 배경으로 한 이색적인 광고도 나왔을 만큼 손노리는  ‘버그’로 인한 오명을 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강철제국>은 난이도 조절 실패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했고, 일본 게임 <하이리워드>를 모방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 사이, 소프트맥스는 <창세기전 3>에서 다른 국산 게임에서는 볼 수 없는 수준 높은 동영상과 전문 성우 기용, 그리고 여전히 유효한 소프트맥스표 시나리오와 이야기의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에피소드 시스템으로 <창세기전>을 한 번 더 발전시키며 손노리와 격차를 더욱 벌려 가고 있었다.


메인 화면처럼 평온하게 실행되었다면 악명을 떨치지는 않았을 듯.

창세기 시리즈로 전성기를 누려

게임 환경의 변화는 소프트맥스와 손노리의 경쟁 관계를 급격히 흔들기 시작했다. <리니지>를 필두로 하나 둘씩 제작되기 시작한 온라인 게임들은 패키지 게임 시장의 영역까지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고,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불법복제는 패키지 게임의 시장 규모를 점점 옥죄어 갔다. <씰>과 같이 재미를 인정받은 게임들조차 불법복제의 이슬로 사라져가던 황혼의 시기인 2000년 12월, 손노리와 소프트맥스의 마지막 정면 대결이 일어났다. 손노리는 그라비티와 손을 잡고 약 2년 동안 개발한 새로운 RPG <악튜러스>를, 그리고 소프트맥스는 창세기전 시리즈의 대단원의 막을 알리는 <창세기전 3 파트 II>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시했다.

손노리와 그라비티의 합작 프로젝트로 제작된 <악튜러스>는 3D 배경에 2D 캐릭터를 얹어 만화풍의 느낌을 주는 데에 주력했고, 주인공 캐릭터인 시즈와 마리아가 서로 잘 어우러지는 아기자기한 전투시스템으로 이전의 손노리 게임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소프트맥스의 <창세기전 3 파트 II>는 <창세기전 3>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어져, 과거 안타리아를 창조한 신들의 세계인 아르케에 간 살라딘 일행의 모험과 반목, 그리고 ‘영혼의 검’과 ‘뫼비우스의 우주’라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창세기전의 대단원을 화려하게 마무리 짓고자 했다. 출시를 앞두고 두 게임의 콘셉트와 정보들이 조금씩 공개되며 소프트맥스와 손노리의 골수팬들은 게임 출시 이후 일정 시간이 지날 때까지 2000년 12월의 전쟁에서 누가 승리할지를 놓고 설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런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 게임사에서 ‘팬덤’이 충돌한, 전무후무한 일로 기억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소프트맥스와 손노리 모두 이 마지막 정면 대결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악튜러스>는 외주 제작한 게임 내 몬스터들이 표절시비에 휘말려 결국 리콜 소동이 벌어졌고, 게임을 DVD에 담아 출시하려고 했던 계획마저 출시 직전에 취소되는 등 많은 난관을 겪었다. 결국 <악튜러스>는 독특한 느낌의 게임으로 골수팬들에게는 성원을 얻었으나 개발비에 비해 큰 이익을 얻지는 못했고 얼마 뒤에는 게임 전문지의 번들로 제공되는 신세가 되었다. 반면 소프트맥스는 <창세기전 2>부터 이어져 온 상업적인 성공을 <창세기전 3 파트 II>에서도 계속 유지했지만 게임 판매량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또 <창세기전 2>부터 이어져 온 골수팬들 중 상당수는 <창세기전 3 파트 II>에서 내세운 ‘뫼비우스의 우주’라는 결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소프트맥스가 스스로 <창세기전>의 명성을 훼손했다’며 실망과 분노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렇게 황혼의 시기를 불완전 연소시킨 다음 해, 손노리와 소프트맥스는 각각 서로의 역량을 한데 모은 역작,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과 <마그나카르타>를 출시했다. 그러나 이 두 게임은 지난 9월호에 다룬 ‘비운의 명작 게임 Best 7’에 나란히 링크되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나란히 실패를 거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손노리의 경우 특유의 게임성을 인정받았지만 불법복제로 큰 피해를 보면 ‘흥행 실패’를 겪은 반면, 소프트맥스는 설치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심각한 결함이 있는 상품을 출시하는 고객 모독행위와 함께 처참하게 ‘자멸’했다는 것이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도 등장시켜 리얼리티를 높인 창세기전.

막 내린 라이벌 시대

손노리와 소프트맥스, 소프트맥스와 손노리가 가져다 준 ‘로망’은 이렇게 저물었고, 지금은 아무도 PC 패키지 게임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손노리와 소프트맥스 이후 어느 누구도 ‘팬덤’을 형성할 만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한 데에 대해 대개는 게임 환경이 PC 패키지에서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수많은 온라인 게임이 쏟아지며 게이머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게임사와 게이머의 관계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하는 의문이 든다. 내놓은 다음 문제가 생기면 패치 등을 배포하면 그만인 패키지 게임보다는 쌍방향 소통을 중시하면서 베타테스트부터 정식서비스까지 계속 생명을 이어가는 온라인 게임에서 게임사와 게이머들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게임 자체를 즐기는 것이 우선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쌍방향 소통이라는 모양새로 거리는 가까워졌을지언정 좋은 게임을 만들기보다는 게이머나 게임사나 모두 ‘돈이 되는 무언가’에 골몰하는 자세로 서로를 대하고 있기 때문에 게임사에 대한 팬덤이 형성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닐까? 말로는 소통을 이야기하나 서로가 서로를 ‘돈’으로 바라보는 일이 잦아진 지금의 게임 세상은 서글프기만 하다. 그렇기에 소프트맥스와 손노리, 손노리와 소프트맥스가 가져다 준 1990년 대의 로망이 더욱 안타깝고 아쉽다.


악튜러스의 독특한 매력이 저평가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PC방과 스타크래프트, 그리고 e-스포츠
1998년, 위정자들의 경제정책 실패로 찾아온 IMF 한파 탓에 사람들의 씀씀이는 줄어들었고, 도산하는 기업이 줄을 이었으며 실직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지하철역에 노숙자들이 넘쳐나는 우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무서운 기세로 성장한 사업이 있었으니, 바로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네트워크 게임의 열풍을 등에 업고 등장한 PC방 사업이었다. 자타가 공인하듯, PC방 산업의 비약적인 신장은 IMF라는 사상 초유의 불경기 속에서 오히려 IT 업계가 급성장을 기록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스타크래프트> 이전에도 PC방은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PC방은 인터넷 전용선이 없는 이들이 잠깐씩 웹서핑을 하거나 문서출력 또는 메일 확인 등의 업무용이었고,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았다. PC방을 이용하는 이들은 차츰 다른 흥미 거리를 찾게 되었고, 그들에게 선택받은 것이 박진감 넘치는 게임 진행과 3종족의 물고 물리는 줄거리를 담은 <스타크래프트>였다.

보통 당시 게임과 PC방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스타크래프트>와 PC방이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를 가져다주며 게임산업과 IT산업을 동시에 발전시켰다고 요약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스타크래프트>를 비롯한 멀티플레이 게임들이 PC방에서 처음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PC방 산업이 게임업계의 수익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인터넷을 이용해 게임을 불법 다운로드해서 설치한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이런 ‘동맥경화’는 PC방에서 벌어지는 불법 다운로드에 대해 당국이 단속을 나서며 PC방에서는 PC 1대당 1카피의 정품 소프트웨어를 써야만 영업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한 뒤에야 풀렸다. 비로소 게임과 PC방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PC방에서 정품 쓰면서, <스타크래프트>의 판매고와 PC방 수는 모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컴퓨터 산업도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여기에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는데, 어떤 이들은 PC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이유를 <스타크래프트>를 비롯한 네트워크 게임에서 찾는다. 이는 PC방이라는 공간 자체가 여러 모로 게이머들에게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간과한 이야기이다. 정품을 써야 한다는 의식이 희박한 게이머들에게, 게임을 따로 구입할 필요가 없는 PC방은 이용료만 내고 게임을 무한정 즐길 수 있는, 매우 끌리는 공간이었고 당시는 초고속인터넷의 보급이 막 시작되었던 때였기 때문에 집에서는 즐길 수 없는 초고속인터넷을 PC방에선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비슷한 취미를 가진 게이머들끼리 모이는 데에도 PC방이란 공간은 매우 편리했으며, 무엇보다 PC방은 불황을 틈타 새로운 여가로 인식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구장 등에 비해 PC방의 이용료가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컴퓨터 게임이 ‘돈 적게 드는 경제적인 취미생활’로 서서히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PC방 이용인구는 물론 <스타크래프트> 등을 즐기는 게이머 역시 급속도로 늘어났다. 배틀넷은 항상 초만원 상태여서 아시아 서버 이외의 다른 서버까지 대한민국 게이머들이 넘쳐났고, 자신의 실력을 뽐내며 서로 경쟁하기를 좋아하던 이들은 배틀넷에서 게임을 하다가 의기투합하여 클랜을 조직하는가 하면 모임을 오프라인으로 연계하여 특정 PC방에 모여 서로의 실력을 다지고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게임과 IT업계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인 반향을 크게 일으킨 <스타크래프트>를 이용하여 새로운 시도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 e-스포츠로 일컬어지는 게임리그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PC방도 차별화된 매력이 있어야만 손님을 끌 수 있다.

오프라인으로 뒤쳐나온 게이머

사실, 게임리그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대한민국 게이머들은 배틀넷을 지배하고 있었다. 현재 온게임넷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김태형 씨나 최초의 프로게이머로 알려진 신주영 씨 등이 스타크래프트 배틀넷 래더 시즌 챔피언을 획득했으며, 이후에도 배틀넷 래더의 상위 순위는 대한민국 게이머들이 독점하다시피 할 정도였다. 최초로 방송 중계된 게임리그는 1999년 3월의 <KPGL배 하이텔 게임넷>이었으며, 99년 9월에는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모태라 할 수 있는 <99 프로게이머 코리아오픈>이 열려 최진우 선수가 최초의 우승자로 이름을 남겼다. 당시 선수들은 어두운 배경에, 가까운 거리에 마련된 경기석에서 약간 어긋난 각도로 마주보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우주복 형태의 의상을 입은 상태에서 경기를 해야 했는데, 지금 그 당시의 화면을 보면 매우 보기 민망하여 경기에 몰입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 대회가 가져다 준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프로게이머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가 구체화되기 시작했으며, ‘즐기는 것’에 만족했던 게이머들이 하나 둘씩 ‘보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게임방송의 가능성을 확인한 온미디어는 투니버스에서 게임 방송의 편성을 늘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2000년 7월 최초의 게임전문채널인 ‘온게임넷’을 개국했다.

이후 온게임넷을 따라 GGTV, 겜비씨(현 MBC게임), Ghem TV(현 게임TV) 등의 여러 게임 전문채널이 생겨났고 KBK, KIGL, 게임큐, GGTV 등의 여러 대회가 생겨나며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붐이 일어나는 듯 했으나 자금난 등을 이유로 군소 채널과 몇몇 대회는 1~2년 뒤 자취를 감췄고, 온게임넷 스타리그, KPGA(현 MSL), Ghem TV 스타리그의 3개 대회가 메이저 대회로 남았다. 2003년 중반 Ghem TV 스타리그가 방송사의 내부 문제로 폐지되었으며 지금은 온게임넷의 스타리그와 MBC게임의 MSL만이 공식리그이자 양대 메이저 대회로 남아 있다.

약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e-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들이 배출되었는데, 다른 선수들은 몰라도 e‘임이최마’라고 불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은 전설적 선수들에 대한 소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프로게이머들의 노력과 경쟁, 명승부, 그리고 게임 전문 방송국 관계자들의 열정과 패기 덕에 각 방송사의 게임리그들은 한층 열기를 더해갔고, 2004년 KTF EVER 컵을 시작으로 프로리그가 창설되어 e-스포츠는 팀 체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프로리그가 진행되면서 프로게이머들은 기업과 게임 전문 방송사가 창단한 게임단에 소속되었으며, 그런 과정에서 최초의 억대 연봉을 기록한 임요환 선수나 3년간 7억5천에 계약한 이윤열 선수와 같은 고액 연봉자들도 탄생했다. 또 공군 ACE 팀의 창단으로 프로게이머의 직업 수명도 연장되어 e-스포츠는 어느덧 농구, 야구, 축구 등 다른 프로 스포츠와 비슷한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쌈장’ 이기석 선수의 코넷 광고 출연 모습.

임요환(Slayers’_Boxer) 테란이 암울하던 스타리그 초기에 테란 종족으로 등장하여 재기 넘치는 전략과 승부욕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며 스타리그와 WCG 2회 연속 우승, 최초의 양대 메이저 대회 동시 우승 등의 업적을 쌓고, 60만의 팬을 거느렸던 위대한 선수. 공군 에이스 팀에서 제대한 뒤 30대 프로게이머로 여전히 활동 중이며 ‘테란의 황제’, ‘Boxer’ 등으로 불린다.

이윤열(NaDa) 2002과 2003년 당시 3개 게임방송사에서 같은 시기에 치러진 스타리그, MSL(당시 KPGA), GhemTV 스타리그를 모두 휩쓴 전무후무한 그랜드슬래머. MSL 최초 3연패, 스타리그 최초 골든 마우스 획득, 양대 메이저 대회 6회 우승(준우승 4회)으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록과 위업을 쌓으며 2009년에도 메이저 대회 8강에 이름을 올린 올드게이머의 자존심. ‘살아있는 전설’, ‘천재테란’ 등으로 불린다.
최연성(OOv) 이윤열 선수 이후 MSL 3연패의 위업을 재차 이루는 등 총 다섯 번의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한 선수. 그러나 우승보다 그를 더 강렬하게 만들었던 것은 상대를 ‘버스 태운다’라고 할 만큼 압도적인 힘과 날카로운 전략으로 찍어 누르는 압도적인 승리 그 자체였다. 지병인 손목 부상으로 조기 은퇴한 뒤 지금은 코치로 활동 중이며, ‘괴물’, ‘치터테란’ 등으로 불린다.

마재윤(Savior) 자신의 아이디처럼 저그가 암울하던 시기에 나타나 MSL 5회 연속 결승진출이라는 희대의 업적을 쌓고, 나아가 온게임넷 스타리그까지 한번에 정복하며 저그 팬들과 새로운 강자를 염원하고 있던 이들에게 구세주로 일컬어졌던 선수. 아쉽게도 양대 리그 우승을 목전에 두고 김택용 선수에게 일격을 당했다. ‘마에스트로’, ‘마본좌’ 외에 약 100여 개의 별명을 갖고 있다.

프로게이머, 스타가 되다
어느덧 10년을 맞은 지금의 e-스포츠에는 긍정적인 부분만 남아있는 것만은 아니다. 언뜻 보면 ‘임이최마’와 같은 전설들을 대신해 ‘택뱅리쌍’이라고 불리는 김택용, 송병구, 이제동, 이영호 선수 등을 비롯한 인기와 실력을 모두 갖춘 선수들이 매우 활발히 활약하고 있고, 시즌 중에는 주5일 프로리그가 치러지는 등 경기 수도 대폭 늘어났지만, 불안 요소들로 인해 갈수록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스타크래프트 외에 e-스포츠의 주축이 될 만한 종목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불안 요소다. 워크래프트 3 리그는 방송사 PD의 맵 조작 파문과 방송사의 푸대접으로 인해 메인에서 멀어져 버렸고, 카운터스트라이크 리그는 전략적으로 팀이 육성되고 대회가 열리는 외국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리그가 좀처럼 정례화 되지 못해 이 두 게임의 선수들은 외국에 나가 대회를 치르는 일이 빈번하다. 국산 e-스포츠 종목은 더 문제가 심각한데, 수십 개의 게임이 공인종목에 등록되어 있지만 대부분 제대로 된 리그 하나 열지 못하고 있고, 열었다 해도 게임사의 비협조 등으로 인해 어느 순간 소리도 없이 좌초된 카트라이더 리그나 결승전에 축하공연을 온 가수의 팬들에게 철저하게 굴욕을 당한 스페셜포스 리그처럼 국산 게임의 게임리그는 재미 요소의 부재와 게임의 홍보 차원에서만 e-스포츠를 이용하는 그릇된 자세 때문에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주5일제로 진행되는 프로리그 역시 서서히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상황이고 최근엔 대부분의 게임단마저 주5일제에 반대표를 던지고 있는 상황이다.


‘살아있는 전설’ 이윤열은 가장 꾸준한 프로게이머이기도 하다.


‘테란의 황제’ 임요환은 30대 프로게이머의 꿈을 이루고 있다.

스타크래프트  ≥  e-스포츠

e-스포츠의 집행을 맡은 한국 e스포츠협회(KeSPA)가 난맥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온게임넷과 MBC게임 등의 게임 전문 방송사가 시작한 e-스포츠에 난데없이 중계권 제도를 도입하여 개인리그 중단이나 프로리그 출범 지장 등의 사태를 야기하는가 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규정을 신설해 몰수패를 남발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KeSPA표 졸속 행정의 정점은 최근의 프로게이머 FA(자유계약) 제도였는데, FA 대상이 된 선수는 연봉이 가장 높은 팀이 아니라 입찰 총액이 가장 높은 한 팀하고만 협상할 수 있는 등 선수에게는 팀 선택권도 없고 최대 연봉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형편없는 제도여서 팬들은 물론 언론으로부터도 자유 계약 제도가 아니라 자유 경매 제도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공정성과 투명성을 도구로 일을 추진해야 하는 협회가 이 정도로 믿음을 잃은 상태에서 e-스포츠가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다는 것은 신기할 정도이다.

마지막 문제는 블리자드다. 블리자드는 <스타크래프트> 때와는 달리 <스타크래프트 2>에 대해서는 출시 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저작권과 지적재산권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협의나 대비를 하려는 움직임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블리자드는 곰TV와 손을 잡고 곰TV의 공인리그인 ‘TG 삼보 인텔 클래식’을 대한민국 유일의 블리자드 인증 리그로 칭하기 시작했는데, 최근 KeSPA 이사회 회사(이사사)들 중 대다수가 이 리그에 대해 석연찮은 불참을 선언하면서 3회까지 치러진 TG 삼보 인텔 클래식의 차기 대회에는 더 이상 프로게이머들이 출전하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파이’를 키워도 모자랄 판에 오로지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만 선수를 출전시키겠다는 담합이 공인리그 하나를 고사시키고 있다.

e-스포츠의 종주국으로서 발전적인 계획을 세운다 해도 국가에서 e-스포츠를 중점 육성하며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는 중국 등의 후발주자에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인데, 아직까지도 KeSPA와 이사사들은 리그 존속과 선수들의 생계를 볼모로 블리자드나 방송사 등과 소모적인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다. 이런 불협화음이 계속되면 국내외 팬들에 적잖은 실망을 끼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KeSPA는 여전히 소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자세다.

e-스포츠가 10년 남짓된 지금, 서서히 고조되는 불안 요소들을 이기지 못하고 그 동력을 잃어버리거나 <스타크래프트>에만 기대어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버린다면, e-스포츠는 물론 게임과 IT 업계에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될 것이다. e-스포츠의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게임업계도, IT업계도, 그리고 팬들도 관심과 힘을 보태야 할 권리와 의무를 지고 있다.
 
외적으로는 블리자드를 비롯해 되도록 많은 대상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여 e-스포츠의 동력 발굴과 새로운 콘텐츠 창출에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고, 내적으로는 KeSPA와 이사사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근시안적인 정책과 주먹구구식 행정 등 근본을 어기는 실책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프로게이머들의 권익 역시 더욱 보호되어야만 뿌리부터 흔들리는 e-스포츠의 불안 요소를 없앨 수 있다.

바츠해방전쟁, 게임의 영역을 넘어선 허상
신문이나 방송 등을 통해 온라인 게임에 대한 여러 기사를 읽다 보면 게임사의 CEO나 개발자들은 물론이고 인터뷰에 응한 게이머들까지 마치 무슨 어록이라도 읊는 양 으레 하는 이야기가 있다. ‘온라인 게임의 이야기는 게이머들과 함께 만들어 나간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상황과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갖지만 게이머들의 관점에서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례는 아마도 온라인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상호 작용이 게임이라는 가상 영역을 벗어나 실생활에서 영향을 미칠 때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이런 일은 매우 쉽게 찾을 수 있고 또한 빈번하게 일어난다. 온라인 게임에서 만난 이들이 뒷거래를 하거나, 실제로 만나 서로의 갈등 관계를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일은 사건/사고란에 빠지지 않고 실리는 단골 이슈다. 온라인 게임에서 만난 커플이 실제로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는 일도 이제는 특별한 이슈가 못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 중, 드물게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거대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런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바츠해방전쟁’이다.

가진 자들에 의한 폭정의 역사

<리니지 2>라는 게임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바츠해방전쟁의 무대가 된 <리니지 2>에는 혈맹 등의 세력이 존재하고 레벨과 장비에 따라 강한 캐릭터가 힘없는 캐릭터를 억누르고 차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상 세계다. 높은 레벨의 캐릭터가 모인 지배 혈맹이 낮은 레벨의 게이머들이나 군소 혈맹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화목하게 지내면 큰 다툼이 생기지 않지만, 세율을 올리고 사냥터를 통제하는 등의 폭정과 억압을 일삼으면 그로 인한 반목과 대립이 커지게 된다. 게이머들은 경쟁에서 이기고 압제와 반목과 대립을 겪지 않는, 소위 ‘지존’이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리니지에서 기득권을 선점한 대부분은 사냥터의 통제나 무분별한 PK 등으로 경쟁자가 나타날 싹을 애초부터 잘라냈다. <리니지> 1편부터 두드러진 이런 ‘리니지식’ 게임문화는 게임의 룰을 벗어난 현금거래, 계정거래 등의 불법·탈법적 행동을 유도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리니지 2>의 30여 개의 서버 중 제1서버인 ‘바츠’ 서버는 그런 압제가 유독 심했다.  오픈 베타 테스트가 시작된 직후부터 바츠 서버를 지배해 온 드래곤 나이츠(DK) 혈맹의 악행 때문이었다. 이들은 <리니지>부터 최고의 악명을 떨친 지배 혈맹이었으며, <리니지 2>로 넘어와서도 힘의 논리에 의한 전횡을 그치지 않았다. 사냥터 통제와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이들에 대한 무차별 PK는 물론 운영정책상으로 계정압류 대상인 봇 플레이까지 버젓이 활용하며 부당이득을 취하는 등 게임 안에서 할 수 있는 불법과 탈법은 모두 저지르고 있었다. 자연히 바츠 서버에서 DK혈맹에 대한 반감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다. DK혈맹은 통제와 자신들의 봇 플레이 활용 등을 공공연히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세율까지 높여 다른 게이머들이 바츠 서버 안에서 게임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결국 DK혈맹의 폭정과 독재를 견디다 못한 게이머들은 2004년 5월, 바츠동맹군의 중심인 붉은혁명 혈맹의 기란성 점령을 시작으로 전쟁의 서막을 올렸고, 많은 이들이 반 DK혈맹 동맹군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바츠 서버의 폭정과 독재를 알리는 호소문이 커뮤니티 전체에 퍼지자 수많은 리니지 2 게이머들은 서버를 초월하여 반 DK혈맹 동맹군에 가담했는데, 바로 ‘내복단’이었다.

당시는 서버 이전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서버에서 리니지 2를 하고 있던 게이머들이 바츠 서버에 1레벨 캐릭터를 만든 다음, 기본 장비와 값싼 단검만을 손에 쥔 채 DK혈맹에 맞선 것이다. 최고 지존에 해당하는 캐릭터에게 레벨 10도 되지 않는 내복단 캐릭터들이 단검 하나 부여잡고 싸움을 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복단으로 참전한 이들의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100여 명의 내복단이 상대의 힐러나 마법사 등 방어력이 낮은 캐릭터들을 차례차례 집중 공격하면 공격당하는 상대는 랙(순간적인 지연 현상)과 순간적인 데미지 중첩으로 손도 써 보지 못하고 각개격파 당할 수밖에 없었고, 힐러 등을 잃어버린 DK혈맹은 체력을 회복할 수 없어 하나 둘씩 쓰러져갔다.

독재에 맞서 일어선 게이머들
DK혈맹과 그들의 연합군은 여론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바츠 서버의 절대악으로서 항전했으며, 내복단 역시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바츠 서버로 밀려들었기 때문에 리지니 서버의 지배를 상징하는 5개 성 주변에는 캐릭터들이 무더기로 죽어있는 것을 항상 볼 수 있었다. 바츠동맹군은 더욱 강해져 30여 개의 전쟁 혈맹이 ‘바츠 해방’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고, 내복단에 의해 DK연합군의 상징적 존재인 아키러스가 전사한 것도 모자라 DK연합군 안에서는 내분도 일어나 DK혈맹 다음 가는 규모를 유지했던 제네시스 혈맹이 바츠동맹군에 투항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7월 17일, 운명의 아덴성 공성전이 벌어졌다. 바츠동맹군은 더욱 불어나 약 40여 개의 혈맹이 집결했지만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DK연합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고레벨 캐릭터들이 대부분 DK연합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만일 지배 혈맹과 상의 없이 일정 레벨 이상을 올리면 DK혈맹과 같은 지배 혈맹은 척살령을 내려 해당 캐릭터의 레벨을 강제로 떨어뜨리고 했다.

그러나 바츠동맹군은 <리니지 2>의 공성전 등록 시스템을 이용해 적을 기만시키는 데 성공했고, 수적 열세를 극복하였다. 결국 동시에 진행된 오렌성과 아덴성의 공성에서 오렌성을 치러 갔다가 아덴성의 위기를 감지하고 귀환한 DK연합군이 내복단의 결사적 저항 속에 가로막혀 있는 동안 바츠동맹군이 아덴성 점령에 성공하다. 당시 <리니지 2> 커뮤니티에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게이머들의 사연이 수십 건이나 전해질 정도로 바츠동맹군의 승리는 가상 세계를 초월해 엄청난 환희를 안겨주었다.

공성전에서 패한 DK연합군은 던전 한구석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DK연합군의 철권통치는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아덴성 점령 이후 권력을 손에 넣은 바츠동맹군이 빠른 속도로 분열했고 타락했다.

전쟁 후의 이권다툼에서 바츠동맹군을 주도한 혈맹들 사이에 반목과 대립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츠동맹군 소속의 혈맹들이 예전 DK혈맹처럼 특정 던전에서 봇 플레이와 통제를 시작하자 동맹군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바츠동맹군을 이끌었던 붉은혁명 혈맹이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DK연합군과 손을 잡자 동맹군의 단합은 완전히 무너졌다. 내복단 역시 내복단을 빙자하여 아이템을 갈취하는 강도들이 나타면서 빠르게 와해되어 버렸다.

결국 DK연합군은 세력을 빠르게 회복하여 다시 성들을 탈환했고, 바츠 서버에는 바츠해방전쟁 이전보다 더욱 처절한 참상이 벌어졌다. 단순히 사냥터에서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하루 저녁에 몇 백 명 이상의 캐릭터가 DK혈맹에 의해 살해되고, 기득권층이 사냥터에서 불법적인 봇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내는 게임머니는 현금거래 사이트들을 통해 그들의 부를 축적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DK혈맹의 지배는 혈맹의 총군주 아키러스의 해산령에 의해 스스로 해산할 때까지 이어졌으며, 바츠해방전쟁은 이렇게 종말을 맞았다.

바츠해방전쟁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소설가이자 이화여대 교수인 이인화 씨를 비롯해 많은 이들은 이 사건에 저마다 의미를 부여했다. 이인화 교수는 바츠해방전쟁에 대해 ‘순간의 미학’이나 ‘숭고의 미학’이라는 표현을 썼고, 당시 한겨레는 ‘온라인의 촛불’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적잖은 게이머들은 바츠해방전쟁을 예로 들어 온라인 게임의 줄거리는 그 게임에 자리 잡고 있는 방대한 퀘스트나 설정이 아니라 상호 작용으로 기억된 개인의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바츠해방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며, 고귀하고 성스럽고 영웅적인 가치는 아직도 자신의 눈앞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더러는 “바츠해방전쟁의 스토리를 체험한 <리니지 2> 게이머야말로 귀환하지 않는 영웅”이라고 추앙하기도 한다.

필자는 바츠해방전쟁이 게임의 이야기를 넘어 게임 바깥의 실제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일종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미학도 아니고 진정한 온라인 게임의 스토리도 아니고 영웅적인 가치는 더더욱 아니라고 본다. 단지 ‘어그러진 게임의 법칙’이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을 간과한 채 이제껏 대한민국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거대한 역할놀이에서 거둔 승리에 빠져든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게임상의 결혼식. 그러나 실제로 이어지는 일도 이젠 빈번하다.


바츠해방전쟁 이야기는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리니지 2의 화려한 겉모습 뒤엔 폭정의 역사가 존재한다.

온라인의 일그러진 영웅
바츠해방전쟁과 관련된 일련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온라인 게임은 게이머들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간과하는 엄연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츠해방전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리니지 2> 근본적인 ‘불합리함’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안 고쳐졌다’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되짚어 보면 바츠해방전쟁은 분명 <리니지 2>라는 온라인게임의 바츠 서버에서 일어난 사냥터 통제와 봇 플레이, 그로 인한 현금화, 세금 징수로 인한 부당 이득, 그리고 거대 혈맹의 횡포 등 게임을 게임답게 즐기도록 하지 못하는 여러 불합리한 요소에 맞서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그런 불합리한 요소들 중 불법 프로그램을 이용한 봇 플레이나 일부 무분별한 PK, 다른 유저를 통제하는 일 같은 핵심적인 문제는 게임사가 밝힌 정책대로 게임이 운영되었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이었다. 즉, 바츠해방전쟁 당시의 <리니지 2>는 게임의 법칙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어그러진 가상 세계였고 불공정한 전장이었다. 게다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승리가 가져다 준 성취감과 분에 넘친 권력에 도취되어 자신들이 타도하려 했던 불합리함을 스스로 자행하는 모순 앞에 게이머들의 선의는 휴지조각처럼 버려지고 말았다.

5년이 지난 지금도 바츠 서버를 비롯한 <리니지 2>의 여러 서버에는 이권 다툼을 위한 공성전이 존재하고, 거대 혈맹의 횡포가 여전하다. 힘 있는 이들이 이끄는 작업장은 그대로고 게임의 규칙을 어기고 부를 축적하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 여전히 힘 있는 혈맹은 게임의 정책과 약관을 대놓고 무시한다. 이를 묵인하는 게임사의 파렴치함도 여전하다. 그런 이들 사이에서 리니지라는 이름의 게임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되어 오늘도 굴러가고 있다. 이것은 소위 바츠해방전쟁을 추앙하는 이들이 말하는 ‘돌아오지 않는 영웅’을 비롯한 수많은 게이머들이 게임의 법칙이 아니라 어그러진 돈과 힘의 논리 아래 순응하고 굴복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바츠해방전쟁은 철저히 실패한 전쟁이자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전쟁이었다. DK혈맹에게 다시 성을 빼앗겼고 바츠동맹군이 와해되었기 때문에 실패한 전쟁이 아니라, 게임 자체의 어그러진 불합리함을 바꾸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불합리한 규칙에 길들여진 채 암묵적으로 인정되던 그릇된 합의조차도 게이머들의 힘으로 바꾸지 못했고, 혹은 타락하고 혹은 순응하고 혹은 묵인하며 뒤틀린 가상 세계에 굴복했기에 실패한 전쟁인 것이다. 더불어 이런 ‘반민주’에 굴복한 이야기에 ‘온라인의 촛불’과 같은 찬사는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필자 역시 그 당시 <리니지 2>를 즐겼던 게이머였고, 바츠동맹군의 아덴성 탈환 소식에 환호한 게이머였지만,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 바츠해방전쟁의 이야기를, 게이머들의 노력으로 게임 자체를 극복한 결과물이자 온라인의 진정한 스토리인 양 포장하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때를 돌이켜 볼 때마다 바츠해방전쟁과 같은 게임 내의 분쟁으로 게임에서 행해지는 불합리함을 바꾸는 것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온라인 게임의 어두운 문화는 이미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영향을 미쳐 아무리 선의를 발휘한다 해도 게임 속의 불합리함을 해소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불합리함을 활용하고, 정상적인 규칙을 악용하는 것이 능력인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임의 법칙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오직 ‘돈’과 ‘권력’만을 바라보는 세력들과 그를 묵인한 게임사는 허상으로 끝난 바츠해방전쟁을 비롯한 여러 슬픈 이야기들을 낳았다. 그런 사건들이 ‘유저들이 만들어 나가는 온라인 이야기’라는 탈을 쓰고 오늘날도 온라인 게임의 ‘빛’을 빙자한 ‘어둠’으로 자리 잡은 채 게임 세계에 기생하여 ‘온라인 게임의 이야기는 게이머들이 만들어 나간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자신들의 합리화를 위해 그릇된 방향으로 전파하고 있는 것은 매우 씁쓸한 일이다.


바츠동맹군이 자신들의 결속을 위해 만든 징표.

Power of One, Blizzard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흥행 게임들이 나타났고, 그 히트 게임들보다 수백 배 많은 게임들이 시장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게다가 흥행 게임을 배출했다 해도 그 게임이나 후속작이 지금까지 게이머들의 곁에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15년 동안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게임사가 있다. 바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다.

한 웹진에서 ‘로마인 이야기’의 제목을 패러디한 ‘블리자드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기획기사의 제목처럼, 블리자드는 1991년에 설립되었을 당시에는 그저 그런 중소 개발사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여러 게임들이 신통치 않은 반응을 얻다가 1994년 비로소 블리자드라는 이름에 걸맞은 첫 게임인 워크래프트의 1편인 <워크래프트 : 휴먼과 오크>를 출시한다. 이 게임은 이후 블리자드가 10여 년의 세월 동안 제작, 출시한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시초가 되는 게임이었다.

<워크래프트 1>은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당시 전략시뮬레이션 장르는 <워크래프트 1>보다 2년 먼저 출시된 웨스트우드의 <듄 2>가 이미 지배하고 있었다. 후발 주자였던 블리자드는 좋든 싫든 <듄 2>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듄 2>의 팬들은 <워크래프트 1>을 가리켜 아류작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였다. 지금 게임시장을 선도하는 블리자드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상상이 안 가는 일이지만 블리자드의 이름을 알렸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게임이었다.

1년 뒤인 1995년,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신작인 <워크래프트 2: 어둠의 물결>을 내놓았다. 전작인 <워크래프트 1>보다 스토리 연출과 재미 요소 등에서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인 덕에 전 세계적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지만, <워크래프트 2> 역시 웨스트우드의 아성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블리자드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웨스트우드가 <커맨드 앤 컨커: 타이베리안 돈>에 이어 대한민국 게이머들은 물론 전 세계 게이머를 사로잡은 역사적인 게임인 <커맨드 엔 컨커: 레드 얼럿>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블리자드는 개발 규모를 불릴 필요가 있음을 느꼈고, 자사의 규모를 키우는 과정에서 <워크래프트 2>의 외주 제작을 맡았던 콘도르라는 개발사를 인수하여 블리자드 안의 또 다른 개발사인 블리자드 노스로 개편했다. 그리고 이 블리자드 노스가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인도한 희대의 역작 하나를 만들게 되는데, 바로 <디아블로>다. 디아블로는 당시 RPG에서 많이 채택했던 턴제 전투 방식의 RPG로 개발되고 있었다. 블리자드 노스의 부사장인 빌 로퍼는 디아블로를 실시간 RPG로 만들자는 의견을 냈고, 블리자드 노스의 개발자는-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필자조차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이 제안을 단 하루만에 구현하며 디아블로의 미래를 180도 바꿔버렸다.

RPG에 실시간 액션을 접목시킨 <디아블로>는 1997년 출시되자마자 화제의 중심에 올라섰다. 턴제 전투 방식의 RPG만이 진짜 RPG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던 수많은 게이머들과 게임 전문가들은 RPG 장르로 출시되었지만 사뭇 다른 성격의 디아블로를 플레이하자마자 심각한 문화적 충격을 겪었고, 디아블로에 대해 극렬한 반대 입장을 견지하던 일부 전문가들은 “ 게임 장르의 근본조차 모르는 잡종”이나 “쓰레기 게임”이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시대착오적인 평가는 디아블로의 독특한 게임성과 새로운 규칙에 열광한 전 세계의 게이머들 앞에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고 게임 전문가들은 디아블로에 대한 위상을 “최초의 복합장르 게임”처럼 선구자적 평가로 수정해야 했다.

하지만 <워크래프트 2>와 <디아블로>로 로열로드의 시작을 달리고 있던 것처럼 여겨졌던 블리자드의 속사정은 매우 복잡했다. 블리자드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초창기에 여러 회사에 인수 ‘당한’ 역사가 있다. 1994년에 유통사 데이비슨 & 어소시에이트에 인수된 것을 시작으로, 1996년 CUC 인터내셔널에 인수됐다. 다음 해에는 부동산 그룹인 센던트 소프트웨어에 인수되었지만 센던트 소프트웨어의 부정 회계사건 이후 프랑스의 출판 미디어 관련 회사인 하바스에 다시 인수되었고, 이 하바스를 비벤디가 인수하면서 조직 개편에 의해 블리자드는 비벤디 유니버설 게임즈의 자회사가 되었다.
 
이런 과도기에 <디아블로>의 확장팩인 <헬파이어>는 블리자드가 아닌 시에라 온라인과 시노조익 소프트웨어가 개발과 유통을 맡았는데, 그 이유는 하바스가 비벤디에 인수되는 과정에서 블리자드 외에 시에라 온라인도 인수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 블리자드는 현재까지도 이에 대한 입장 표명을 꺼리고 있다.


워크래프트 1, 2는 블리자드의 시작을 알리는 게임들이다.


이상하게도 블리자드가 만들지 않았던 <디아블로>의 확장팩 <헬파이어>.


무분별한 C&C 시리즈의 출시로 자멸한 웨스트우드.

반전의 문제작, 디아블로
거듭된 인수의 역사를 지나 비벤디에 안착한 블리자드는 주력 상품인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웨스트우드를 뛰어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디아블로가 공개되기도 전인 1995년부터 있었는데, 바로 <스타크래프트>였다. 초창기 <스타크래프트>는 <워크래프트 2>의 인터페이스에 배경만 우주로 바꾼 게임이었다. 이 게임의 알파 버전은 공개하자마자 엄청난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그런 식상하고 어설픈 시도가 인정받을 리 만무했던 데다가 당시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들을 ‘전멸’시켜 버릴 만한 게임이 나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블리자드를 포함한 전 세계 게임 개발사들을 KO시킨 문제의 게임은, 바로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이었다.

블리자드는 공개했던 알파 버전을 깨끗이 리셋시키고 처음부터 다시 <스타크래프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 공개되었던 알파 버전처럼 안일한 태도로 게임을 만들지 않기 위해 만족할 만한 버전이 나올 때까지 개량에 개량을 거듭했고, 발표한 날짜를 몇 차례에 걸쳐 연기한 뒤 1998년이 되어서야 <스타크래프트>를 내놓았다. <스타크래프트>는 <워크래프트> 시리즈와 비교해 볼 때 SF 분위기로 무대를 바꾸었다는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차이를 보였는데 테란, 저그, 프로토스라는 서로의 상성과 역상성이 분명한 유닛과 3종족 체제를 만들어 밸런스를 조정했고 전 세계의 게이머들이 배틀넷에 들어와 <스타크래프트>를 즐길 수 있게끔 인도했다.

<스타크래프트>의 선풍적인 흥행에 역전을 허용한 웨스트우드는 뒤늦게 <커맨드 앤 컨커 2: 타이베리안 선>을 내놓으며 수성의 의지를 굳건히 하려 했으나 특정 하드웨어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스타크래프트>보다 박진감이 떨어지는 게임 진행, 그리고 특유의 동영상 효과 등이 게임의 플레이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여 전작만큼 인기를 끌지 못했다. 게다가 <커맨드 앤 컨커 1>이 흥행할 때 확장팩과 외전격 패키지를 무분별하게 내놓은 것도 커맨드 앤 컨커(C&C)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독’이 되고 말았다. <스타크래프트>는 대한민국에서만 약 500만 카피가 팔리며 지금까지도 PC방 점유율 10위 이내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 국민게임으로 남은 반면, <커맨드 앤 컨커 2>는 한때 게임 리그도 열리는 등 흥하는 듯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잊힌 게임이 되고 말았다.

<스타크래프트>의 ‘초대박’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시장을 틀어쥐기 시작한 블리자드는 <디아블로>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 <디아블로 2>에 이르러 지배력을 한층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디아블로 2>의 대항마로 웨스트우드에서 출시한 <녹스>는 지난 9월호에 소개한 ‘비운의 명작 게임 Best 7’에 이름에 올릴 정도로 굴욕적 패배를 기록했고, <디아블로 2>는 <창세기전>과 같은 소수 게임을 제외한 국내외의 PC 패키지 게임들을 전멸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이제, 블리자드의 앞에는 탄탄대로만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디아블로 2>가 나오고 2년 뒤인 2002년에 출시한 <워크래프트 3: 혼돈의 시대> 역시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디아블로 2>는 확장팩의 이름처럼 ‘파괴의 군주’가 되어 전 세계의 RPG 게임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리자드는 자사의 가장 큰 성공 동력인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에 어느 정도 한계가 오고 있음을 직감했고 새로운 시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인간지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이런 새로운 시도가 바로 위기의 단초가 되었다.

처음에는 워크래프트 세계관을 통한 외전격의 게임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워크래프트 어드벤처: 부족의 지배자>라는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다음으로는 스타크래프트를 활용한 새로운 게임이었다. 2000년부터 블리자드는 다른 개발사와 손을 잡고 <스타크래프트: 고스트>라는 잠입 액션 게임을 개발하는 듯 했지만 협업 중인 개발사의 계약 파기와 품질 문제로 인해 이 프로젝트도 영원히 어둠에 묻히고 말았다. 더욱이 이 프로젝트 이외에도 블리자드는 몇 개의 프로젝트를 아무런 소득 없이 날려버렸다. 블리자드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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