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안에서 계산은 CPU가 하지만 그래픽 관련 처리는 GPU 몫이다. 지난 30년간 이 사실은 전혀 변함 없었다. 하지만 올해부터 이런 편 가르기가 더 이상 의미 없어질 전망이다. 1월에 열린 전자제품 전시회 CES에서 인텔은 2세대 코어 프로세서를 발표했고, AMD도 이에 질세라 ‘퓨전 APU’로 반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 중 이달의 핫 프로덕트 주인공은 퓨전 APU다. CPU에 GPU까지 더한 AMD의 퓨전 APU에 대해 살펴보자.
‘독야청청’하던 CPU는 잊어라
CPU를 우리말로 옮기면 ‘중앙처리장치’다. 그래픽 카드가 꽂히는 확장 슬롯의 규격이 ISA에서 AGP를 거쳐 PCI 익스프레스로 변할 때까지, CPU는 메인보드 한쪽에서 무게를 잡고 다른 하드웨어를 부리는 데 충실했다. 내장 그래픽 코어도 메인보드의 칩셋에 둥지를 차렸지 ‘감히’ CPU 영역을 넘보려 하지 않았다. ‘계산’하면 CPU, ‘그림’하면 GPU라는 틀은 쉬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런 관계는 1981년에 단 네 가지 색으로 화면을 그려내는 그래픽카드인 CGA가 세상에 나온 뒤로, GPU가 복잡한 계산까지 처리하게 된 오늘날까지 전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CPU와 GPU의 ‘기묘한 동거’는 30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인텔이 ‘샌디브리지’로 부르던 2세대 코어 프로세서를 내놓은 데 이어, AMD도 이에 질세라 모바일용 ‘퓨전 APU’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름도, 내부 구조도, 만든 회사도 다를 지언정 독야청청하던 CPU안에 GPU가 비집고 들어왔다는 사실만큼은 똑같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두 회사 모두 ‘CPU’라는 용어를 더 이상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텔은 예전부터 ‘무언가를 처리하는 장치’라는 의미를 담은 ‘프로세서’(Processor)라는 단어를 써왔고, AMD는 ‘무언가를 가속시켜(Accelerated) 처리하는 장치’라는 의미를 담은 ‘APU’라는 단어를 썼다. 두 회사 모두 묵묵히 계산만 하던 CPU는 잊어 주기를 바라는 눈치다.
2010년 12월 AMD 코리아 본사에서 AMD 관계자가 퓨전 APU를 설명하고 있다.
퓨전 APU가 겨냥하는 시장은 ‘모바일’
지난 1월 4일 모습을 드러낸 퓨전 APU는 용도에 따라 크게 두 개의 제품군으로 구분된다. 개발명 ‘자카테(Zacate)’로 알려져 있었던 E 시리즈는 주로 중급 이상 노트북 컴퓨터나 미니 PC용이다. 개발명 ‘온타리오(Ontario)’로 알려졌던 C 시리즈는 저가형 넷북을 위해 만들어졌다. 담을 수 있는 코어는 최대 2개이며, 노트북 생산 회사들은 설계하는 제품의 용도나 시장에 내놓을 가격에 따라 적절한 것을 골라 쓰면 된다.
퓨전 APU 역시 일반적인 계산을 담당하는 부분과 그래픽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계산을 담당하는 부분에는 AMD가 새로이 개발한 모바일용 프로세서 ‘밥캣’(Bobcat)이 들어간다. 밥캣은 배터리 사용 시간을 늘리고 두께를 얇게 만들어야 하는 노트북이나 미니노트북을 고려해 소모 전력을 최대 10W까지 낮춘 것이 특징이다. GPU까지 포함한다면 소모 전력은 최대 18W다. 40나노 공정으로 만들어졌으며 DDR3 1066MHz 메모리를 지원한다.
밥캣에 들어간 여러 기술들도 기존 AMD CPU와 크게 다르지 않다. NX비트 기술은 메모리 영역에서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것을 막아 보안을 돕는다. 64비트 운영체제를 돌리는데 꼭 필요한 AMD64 명령어는 물론 가상화 기술인 AMD-V까지 담았다.
그래픽을 담당하는 GPU는 두 제품이 다르다. E 시리즈에는 모빌리티 라데온 HD 6310을, C 시리즈에는 모빌리티 라데온 HD 6250을 썼다. 엔진 클록은 모빌리티 라데온 6250이 6310보다 약 40% 낮으며 이에 따라 연산 능력도 그만큼 차이난다. 다이렉트X 11과 오픈GL 4.0, 오픈CL 1.1을 지원하는 것은 두 GPU 모두 같다.
10원짜리와 크기가 비슷한 APU 칩셋.
HD 동영상과 배터리 사용 시간에 중점 둬
이처럼 CPU와 GPU가 한 데 합쳐진 퓨전 APU는 예전에 상상하기 힘들었던 여러 일을 할 수 있다. 미니노트북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노트북이 차지하던 위치를 빼앗는데 성공했지만, 근본적으로 성능 문제를 안고 있다. 예컨대 웹 서핑이나 간단한 문서 작성에는 무리가 없지만 무거운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힘에 부치는 성능이 단박에 드러난다. 특히 HD 동영상을 보려고 하면 대부분 뚝뚝 끊겨서 제대로 볼 수 없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HD 동영상은 용량을 줄이기 위해 H.264 코덱으로 압축되어 있는데 이것을 다시 풀어내려면 CPU 성능이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니노트북에 내장된 CPU만으로 H.264 동영상을 부드럽게 재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퓨전 APU에 내장된 통합 비디오 디코더(UVD)는 H.264 동영상을 재생할 때 필요한 여러 가지 계산을 거들어 준다. 통합 비디오 디코더에는 여러 버전이 있는데 퓨전 APU에는 H.264 동영상은 물론 DivX, Xvid 동영상까지 처리할 수 있는 최신 버전인 UVD 3이 들어갔다. AMD에서는 ‘UVD 3를 이용하면 1080p 동영상까지 돌릴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웹 사이트에서 동영상이나 화려한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어도비 플래시다. 이 플래시는 용량은 적지만 재생하려면 CPU 성능이 높아야 한다. 플래시가 들어간 인터넷 창을 늘이거나 줄여도 그림이 깨지지 않도록 여러 가지 처리를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니노트북으로 웹 브라우저를 띄운 다음 플래시로 만들어진 사이트에 접속하면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나며 냉각팬이 돌아가는 것만 봐도 그렇다.
플래시는 그동안 이런 버거운 일을 CPU에만 맡겼지만 지난 2010년 6월 발표된 어도비 플래시 플레이어 10.1부터는 CPU와 GPU에 일을 공평하게 나누어준다. 현재 개발 중인 어도비 플래시 플레이어 10.2부터는 퓨전 APU를 지원해서 플래시로 만들어진 동영상 사이트도 부드럽게 돌릴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노트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배터리 이용 시간이다. 제 아무리 좋은 기술을 담았다 해도 배터리로 오래 버틸 수 없다면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AMD에서 밝힌 자료를 보면 퓨전 APU가 배터리의 전원으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E-350 APU에 DDR3 메모리 4GB, 11.6형 디스플레이(1366×768)를 갖춘 시스템에 62Wh 리튬이온 배터리를 꽂았을 경우, 대기 모드에서는 약 11시간, 3D마크 06을 이용한 테스트에서는 약 4시간 20분 동안 버텼다. 물론 이런 결과는 실제 이용 환경과 거리가 있지만 기존의 6셀 배터리를 단 노트북 이용시간보다는 더 길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데스크톱 시장 공략 위한 A 시리즈 발표 앞둬
퓨전 APU는 미니노트북으로 HD 동영상을 보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에게 배터리만으로도 오래 쓸 수 있다는 장점을 갖췄다. 에이서, 아수스, 델, HP, 삼성전자 등 주요 노트북 제조업체들도 퓨전 APU를 채용한 제품을 곧 내놓을 전망이다. 다만 경쟁사인 인텔이 비슷한 시기에 샌디브리지를 통해 데스크톱과 모바일 시장을 모두 공략하고 있는 것에 비해 AMD의 퓨전 APU는 모바일 시장만 겨냥하고 있다.
AMD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올 상반기 개발명 ‘라노’로 알려진 A 시리즈를 출시할 예정이다. A 시리즈는 32나노 공정으로 만들어지며 듀얼 코어부터 쿼드 코어까지 총 세 개의 제품군으로 나누어 출시된다는 사실이 공개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