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는 현재 격렬하게 진화 중 - 그들이 지은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더라

2010-08-03     PC사랑
네모상자 안의 몸부림
데스크톱 PC는 ATX를 비롯한 몇 가지 규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이들 규격은 오랜 기간을 거쳐 많은 이용자들을 통해 널리 쓰여 왔고, 따라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효율적인 규격으로 자리 잡았다. 한때 인텔과 AMD가 BTX나 DTX 같은 외도를 꿈꾼 적도 있지만 결국 도루묵이 됐다. 다시 말해 일정한 규격 안에서 최대한 세련되고 독창적인 외형을 뽑아내는 게 PC 디자인의 숙제다. 물론 규격도 외형도 이용자가 기준이다.

규모가 큰 PC 제조사들을 비롯해, 케이스 업체들은 오랫동안 규격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했고 시행착오를 겪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케이스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파워서플라이를 후면 입출력 단자부 옆, 다시 말해 CPU 바로 위에 오도록 배치한 것이 있다. 이 방식은 2000년을 전후해 많이 쓰였지만 내부 발열과 유지보수가 불편해 결국 퇴출되었다. 반면 개인용은 아니지만 의외의 시도가 먹힌 예도 있다. 요새 나오는 PC방용 케이스는 앞면에 광학 드라이브를 달 수 있는 베이가 없다. 운영체제를 깔거나 데이터를 백업할 때 빼고는 광학 드라이브를 쓰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마저도 요즘에는 데몬 툴이나 외장 드라이브, 네트워크 기능으로 쓰임새가 더욱 줄고 있다. 베이가 없는 형태는 제작 단가를 줄이는 동시에 부품 도난 사고를 막는 데도 효과가 있다.

규격 이야기를 좀더 끄집어내자면, ATX 이외에 데스크톱에 많이 쓰이는 규격이 마이크로 ATX와 ITX다. 마이크로 ATX는 ATX 규격 케이스와 메인보드의 확장 슬롯을 줄인 것이다. 반면 ITX는 처음부터 소형화에 중점을 두고, 메인보드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기능만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규격은 ATX에 비해 PC를 작게 만들기 좋지만 내부 공간이 좁아서 발열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또 손발을 맞출 수 있는 주변기기가 많지 않고, 값이 비싼 것도 문제다. 때문에 디자인을 중시하는 브랜드 PC에 많이 쓰인다. 가격 대비 성능을 먼저 따지는 조립 PC에는 성격이 맞지 않을뿐더러 확장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니아들은 두 규격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파워서플라이를 CPU 바로 위에 배치한 케이스. 지금은 쓰지 않는 방식이다.


PC방에 맞춰 앞면 베이를 없앤 케이스.


PC 디자인, 2D에서 3D로
지금은 ‘디자인’이 상당히 광범위한 영역을 내포하는 단어로 쓰이지만 과거 디자인을 이루는 것은 주로 선이었다. 제한된 규격 안에서 어떻게든 제품을 차별화하려면 모양이 달라야 했고, 다른 모양을 만들려면 선이 달라야 했다. 어떤 회사는 직선형 PC 디자인을 곡선으로 바꿨다가 다시 직선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3가지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해진 틀 안에서 모양만 가지고 차별화된 제품을 내놓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이 한계를 부순 것이 바로 애플의 ‘아이맥’이다. 1998년, 세상에 나온 아이맥은 모양만 놓고 보면 이전의 일체형 PC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전 PC에서 쓰지 않았던 반투명 소재와 신선한 색상의 조화로 전혀 다른 느낌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때부터 PC 제조사들은 소재나 색상까지도 디자인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흰색 PC 케이스들은 은색, 검정색 등 다른 색상을 가진 케이스들에 자리를 조금씩 내주게 되었다. 개인용 PC에 쓰이지 않던 알루미늄이나 아크릴로 만든 케이스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독창적인 디자인을 쫓다 보니 이런 독창적인 PC도 나왔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진짜 판매되었던 제품이다.


아이맥은 선 중심의 PC 디자인 흐름에 소재와 색상이라는 핵폭탄을 투하했다.

하이그로시와 꽃무늬
요즘 디지털 기기는 ‘하이그로시’ 일색이다. 하이그로시란 광택이 나는 소재나 코팅을 말한다. 원래 피아노와 가구를 멋내는 데 많이 쓰이던 하이그로시는 2000년 들어 자동차와 가전 제품에도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 디자인의 흐름을 쫓던 PC에도 영향을 주었다. PC 디자이너들이 하이그로시에 눈을 돌린 이유는 가전제품처럼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최근에는 PC에 꽃무늬를 넣는 것이 유행이다. 이 또한 가전제품 디자인에서 시작됐다. 대기업들이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무늬를 입힌 가전제품들을 내놓자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외형에 손을 대지 않고 무늬를 더하는 것으로 다양한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은 꽃무늬를 주로 쓰지만 앞으로는 다양한 무늬를 통해 개성을 살린 제품들이 돋보일 것으로 예측된다.

무늬 얘기를 하면 HP의 ‘상감기법’을 뺄 수 없다. 2006년, 국내 대기업들이 무늬를 살린 디자인에 열을 올릴 무렵 HP는 상감기법으로 무늬를 입힌 노트북을 처음 내놓았다. ‘인 몰드 라미네이션’이라 불리는 상감기법은 표면에 광택을 입히기 전에 무늬를 입히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나중에 HP의 제품 디자인을 타사와 차별화하는 일종의 전략이 된다. 결국 델, LG 같은 경쟁사들이 무늬 경쟁에 끼어들면서 그 의미가 좀 바랬지만 말이다.

최근 PC 디자인의 변화는 PC도 가구나 가전제품처럼 인테리어 개념이 도입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오랫동안 PC는 방 안 책상 위에서나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덩치 큰 기계에 불과했다. 반면 지금의 PC는 어디를 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만큼 사람과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PC가 사람들의 일상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디자인도 그에 따라 바뀌었고, 결국 인테리어라는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가전제품 디자인에 인테리어 개념이 도입되면서 PC 디자인도 자연히 이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상감기법으로 무늬를 입힌 HP 노트북.

PC의 변신은 무죄
PC는 지금도 꾸준히 변하고 있다. 하드웨어 성능이 이제 웬만한 이용자들의 기대치를 따라잡으면서 디자인의 비중이 커졌다. 특히 값싸고 성능 좋은 조립 PC가 늘어나면서 갈 곳을 잃은 대기업들은 디자인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한때 시장의 외면을 받았던 일체형 PC들이 요즘 들어 늘어나고 있다. ATX 규격으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공간 효율성과 깔끔한 외형을 무기로 조립 PC와 차별화하자는 것이다. ‘제2의 아이맥 신화’를 열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인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중소기업들의 노력도 만만치 않다. GMC는 화려한 색상에다 광학 드라이브를 수직으로 여는 방식의 ‘R-2 토스트’를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퍼스트바이는 우리 전통의 나전칠기를 응용한 외장하드와 USB 드라이브를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어떤 마니아들은 직접 PC를 꾸미기도 한다. 케이스를 가공해 속이 들여다보이게 하고 형형색색의 LED와 쿨링팬으로 수놓는 것은 기본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게시판에 올라온 온갖 PC 튜닝 사례들을 보면 입이 절로 벌어진다.

한때는 심심하기 그지없던 PC 디자인이 재미있는 변화를 겪고 있다. “PC가 성능만 좋으면 됐지, 무슨 디자인이야?”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PC는 사람이 필요할 때만 쓰는 도구  이상을 넘어섰다. 우리는 PC를 통해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게임을 하고 음악을 듣는 등 다양한 즐거움을 얻는다. 디자인 또한 그 즐거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PC에 디자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커질 것이며 그럴 수밖에 없다.


식빵을 위로 뽑는 토스트 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GMC의 토스트 케이스.


레노버의 일체형 PC.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대기업 PC는 디자인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PC 케이스 제조사 GMC의 디자인 작업실을 찾다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애플이나 소니 같은 해외 굴지의 브랜드는 자주 언급된다. 반면 국내 중소업체라고 하면 “그 회사가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나 있겠어?”하고 우려 반 냉소 반의 질문이 되돌아오기 십상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디자인은커녕 제품 홍보에 투자할 여력도 없는 제조사들이 이미 유명해진 제품을 베끼거나, 싸게 다량으로 케이스를 찍어내는 업체를 찾기에 급급하다. 쇼핑몰에서 LCD나 외장하드, 스피커 등을 찾다 보면 상표만 다르고 모양은 판박이인 ‘스미스 요원’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반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이고 멋진 디자인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업체들도 많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토스터’를 비롯해 독특하고 세련된 케이스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GMC를 찾아갔다.

GMC 디자인 작업실로 들어서자마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에 나란히 붙은 일러스트였다. GMC가 앞으로 내놓을 제품들의 디자인이었다. 현란한 디자인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아, 이거는 찍으면 안 돼요”라며 주의를 주는 직원의 말에 다시 기자의 본분으로 돌아왔다.

1. 개발 회의
디자인에 들어가기 전 어떤 케이스를 만들 것인지 기본적인 사항을 정한다. ‘미들타워냐 슬림형이냐’하는 큰 부분부터 ‘고성능 그래픽카드를 꽂을 수 있어야 하니까 안쪽의 폭을 270mm로 할 것’과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이 과정에서 결정된다.



2. 스케치
이때부터 디자이너의 손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디자이너는 스케치를 통해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굵직굵직한 틀은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림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은 부연 설명을 덧붙여 모든 팀원들에게 디자이너의 의도를 전한다.



3. 모델링, 렌더링
스케치가 디자이너의 구상을 끄집어내는 것이라면, 모델링과 렌더링은 좀더 디테일한 옷을 덧입히는 과정이다. 제품 디자인에 많이 쓰이는 ‘라이노’란 3D 프로그램을 이용해 구체적인 모양을 만들어 낸다. 앞서 기자의 넋을 잃게 했던 디자인들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렌더링을 거친 디자인이 모두 제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렌더링 작업을 거쳐 보통 8~10가지 시안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2~3가지 시안을 뽑는다. 그리고 이를 좀더 개선한 다음, 다시 의견을 모아 최종 시안을 정한다.



4. 데이터베이스
최종 시안에 따라 실물 크기의 모형이 만들어진다. 이를 통해 개선할 점이나 제품에 쓰이는 소재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이것을 데이터베이스로 정리한다.
데이터베이스는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개발자와 디자이너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주문서 역할을 한다. 여기에는 CAD 설계 도면과 모델링 데이터, 시방서※ 등이 들어간다. 데이터베이스를 공장으로 보내면 이를 바탕으로 금형을 만든다.


※시방서(Specification): 제조 방식, 재료, 주의사항 등 도면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사항을 문서로 만든 것이다.

5. 컬러 바리에이션
공장은 제품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전, 시험 차원에서 제품을 몇 개 만들어 본사로 보내 준다. 이것을 ‘시사출’이라고 한다.
디자인 팀은 시사출 제품에 색을 칠한다. 같은 모양에 빨간색, 파란색 등 서로 다른 색상을 입힌다. 이 작업을 ‘컬러 바리에이션’이라고 한다. 색 뿐만 아니라 로고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 입힌다. 컬러 바리에이션이 끝나면 의견을 모아 색과 로고 형태를 정하고, 그 결과를 공장에 알려 제품에 반영한다.





6. 최종 검토, 완성
색과 로고 등 세세한 부분까지 정해지면 공장은 최종 샘플을 만들어 본사로 보낸다. 최종 샘플은 케이스 뿐만 아니라 동봉되는 부품, 포장, 박스 등 모든 것을 소비자가 매장에서 막 구매할 때와 똑같은 상태로 만든 것이다. 최종 샘플을 검사해 문제점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다. 문제가 발견되지 않으면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한다.



“우리 디자인은 많은 고민과 노력의 결실”
GMC 디자인 팀 이태주 과장

곡식과 과일이 농부가 흘린 땀의 산물인 것처럼 디자인 또한 디자이너의 많은 고민을 자양분 삼아 자라는 나무와 같다. ATX처럼 정해진 규격을 가지고 다양한 디자인을 뽑아내야 하는 PC 디자인은 남모를 고민이 따른다. 인터뷰 요청에 응한 이태주 과장의 조심스러운 답변에도 그 고민들이 녹아 있었다.

“요즘은 소비자의 눈이 많이 높아졌다. 그만큼 더 멋진 제품을 디자인하고 싶지만 값이 너무 비싸서도 안 되고, 또 정형화된 섀시 규격을 따르면서 창작성을 살려야 하는 제약이 있다. 디자이너의 이상은 살리되 현실적인 제약을 반영하면서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 늘 어려운 과제다.”

많은 고민만큼 케이스 한 대가 세상에 나오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디자인이 시작되는 스케치부터 금형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최소한 3달이 걸린다. 이후 시사출 제품을 검토하고 최종 샘플 제작, 양산 발주 등 마무리를 하기까지 약 1달이 더 걸리는데, 제품에 따라 각각 다르다. 어떤 제품은 디자인한 지 반 년이 지나서야 나오기도 한다.

“3D 렌더링 작업이 실제로 제품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예측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준다. 반면 실사출 과정까지 간 제품이 렌더링한 것과 너무 다르게 나온 적도 있다. 디자인 작업을 할 때는 큰 오차가 생겨도 바로잡기 쉽지만 막상 금형까지 만들어지고 나면 작은 오차도 수습하기 힘들다. 그럴수록 작업 기간은 더 늘어난다.”
이렇듯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디자인을 하면서 혹시 에피소드 같은 건 없었을까?

“'R-4 불도저'를 만들 때였다. 개발 의도가 ‘불도저처럼 튼튼해 보이는 제품’이라 이름도 불도저라고 지었다. 그런데 당시 대선에 출마한 이명박 대통령의 별명이 ‘불도저’라서 본의 아니게 한동안 ‘이명박 케이스’라고 불렸었다. 덕분에 어떤 분은 ‘후속 제품은 아예 전여옥 케이스로 만드는 게 어떨까?’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대통령과는 전혀 무관하고 그쪽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왠지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