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기업이야기 소니 - 소리를 움직인 워크맨의 힘
좋아하는 가수의 레코드판이나 카세트테이프를 산 뒤 설레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 집에 가야 카세트나 전축으로 노래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원하는 장소는 물론 길을 걷거나 운동할 때도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소니 ‘워크맨’ 덕분이다. 이전엔 없던 이 휴대용 오디오는 당시 생활과 문화를 크게 바꾸는 전환점 제품이며 소니를 세계적인 유명기업으로 만든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이 달에는 컴퓨터, 가전기기, 게임기 등 소니의 복잡한 가계도 대신 국내외 음반 사업과 오디오 제품 사업 판도를 바꾼 ‘워크맨’ 비하인드스토리를 살폈다.
고전 음악의 아버지가 ‘바흐’라면 휴대용 음향기기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소니 ‘워크맨’이다. 지금은 MP3 플레이어가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지만 모두 워크맨이 차려놓은 휴대용 오디오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제품들이다. 2010년 이후 소니가 휴대용 카세트형 워크맨 생산을 중단해 더 이상 ‘신상’은 만날 수 없지만, 생김새와 기능을 바꾼 워크맨은 3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걸으면서 들을 수 있다는 뜻을 담아 만든 초기 워크맨 로고.
점점 작아지는 워크맨 제품에 적합하게 재구성한 현재 워크맨 로고.(우)
‘휴대용 카세트 = 워크맨’ 공식화
‘스카치테이프’나 ‘대일밴드’처럼 하나의 상표가 마치 전체제품을 대표하는 고유명사처럼 굳어버린 것들이 있다. 소니 워크맨도 그중에 하나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까지 수많은 미니카세트가 등장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모두 통틀어 워크맨이라 부른다. 문법에 맞지도 않는 영어 단어가 ‘개인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라는 고유 명사로 영어 사전에 실릴 만큼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디어, 기술력, 눈높이 홍보 전략의 3박자가 고루 갖춰져서다.
워크맨 탄생신화는 1946년 5월, 소니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Ibuka Masaru)와 모리타 아키오(Morita Akio)가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미국 여행 중 트랜지스터 기술을 접한 이부카와 모리타는 1949년 테이프형 녹음기와 트랜지스터 라디오 등을 개발하며 전자기기 전문회사의 기초를 다진다. 이 둘은 1958년 회사 이름을 지금의 소니로 바꾸고 라디오와 카세트 녹음기를 만들며 계속 성장했지만, 1970년 쯤 단순한 녹음과 라디오를 벗어난 새로운 제품 필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아이디어를 찾던 중 이부카는 큰 음향기기를 들고 다니는 자사 직원의 불평을 듣고 음악 재생기의 가능성을 발견해 ‘개인용 음악 엔터테인먼트 기기’라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기로 한다.
기존 취재용으로 쓰던 녹음용 제품에서 녹음 기능을 없애고 작고 가벼운 헤드폰을 달아 움직이면서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콘셉트를 잡았다. 소비 계층으로 잡은 10~20대와 나이대가 비슷한 어린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워크맨’이란 이름을 만들었다. 모리타는 획기적인 제품인 만큼 몸값을 높이자는 주변 의견을 거스르고 소니 창립 33주년이라는 합당한(?)이유를 들어 3만 3000엔을 주장했다. 들어간 기술과 부품에 견주면 저렴한 값이었다. 1979년 1월 드디어 워크맨 초대작 ‘TPS-L2’가 모습을 드러낸다. 카세트테이프를 넣어야 해서 네모난 크기를 벗어날 순 없었지만 들고 다닐 수 있는 몸집으로 줄어든 것만 해도 생김새는 예쁨을 받았다. 원하는 노래를 들으려면 테이프를 바꿔넣어야 했고, 앞뒤감기를 되풀이했지만 당시엔 이러한 번거로움도 놀라운 변화였다.
기술자 출신인 이부카가 제품을 진두지휘 했다면 모리타는 개발 단계는 물론 소비자 층을 꼼꼼히 체크해 눈높이 홍보 전략을 준비했다. 그는 “창의적인 기술력이 성공 요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제품의 기획, 마케팅 창의력이 기술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 음악 관련업계 전문가와 영화, 드라마 배우들에게 워크맨을 공짜로 보냈다. 또 소니 직원들이 직접 워크맨을 착용하고 긴자, 신주쿠 등 일본 주요 시내와 대학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워크맨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운동할 때 유용하고 나만의 제품이라는 콘셉트를 광고에 내세워 워크맨의 장점을 한껏 부각시켰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70~80년대 유행한 팝송을 걸으면서 들을 수 있게 만든 워크맨은 카세트테이프의 발전 뿐 아니라 음반 산업, 생활 습관과 문화 전반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워크맨은 오랫동안 졸업입학 선물 1순위였으며 노래 테이프가 잘 팔린 것은 물론, 워크맨을 넣을 수 있는 가방, 옷 등 다양한 액세서리와 아이디어 제품 산업도 발달했다. 1980년대 후반 열풍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로 뻗어나가 미국에도 불어 파나소닉, 도시바, 산요 등에서 ‘워키’나 ‘아이와’같은 제품이 나왔고, 국내에도 삼성과 LG에서 ‘마이마이’와 ‘아하프리’를 만들며 미니카세트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영향력을 자랑한 소니 워크맨은 전 세계적으로 약 2억만 대(2008년 기준) 이상의 놀라운 판매를 기록했고 소니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어준 효자 상품이다. 지난 2010년 타임지는 1923년 이후 출시 상품 가운데 인류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100대 제품에 워크맨을 꼽았다. 제품은 오래됐을지언정 그때의 향수를 떠올리는 글과 사진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워크맨은 1990년대 중반 CD가 등장하기 전까지 황금기를 누리다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1990년도 후반부터 MP3 플레이어 시장이 활기를 띄면서 점점 추억속의 제품이 되었다.
특허권 논쟁
미니카세트 분야에서 오랫동안 왕좌를 지킨 워크맨의 발목은 잡았던 사건은 초기 특허권 분쟁이다. 1979년에 세계 최초 미니카세트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워크맨 TPS-L2’의 특허가 이미 신청되어 있었다. 워크맨 개발 7년 전인 1972년 독일의 안드레아스 파벨이 이미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스테레오벨트’를 발명해 이탈리아, 미국, 영국 등에 특허를 신청했던 것이다.
파벨은 소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몇몇 제품에 대해서만 특허료를 받았을 뿐이다. 영국 법원은 “소니는 분명히 파벨의 특허권을 침해했다. 하지만 파벨의 특허는 무효다. 워크맨은 오랫동안 축적된 소니의 기술이 발전한 결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최종적으로 소니에게 175억 원을 배상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파벨은 특허권을 포기하고 손해배상을 면제 받았다. 파벨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발명자로 인정은 받았지만 결론적으론 소니의 승리였다. 최고 변호사를 기용한 대기업과 개인의 싸움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임이기지만, 특허권만 냈을 뿐 상업적 성공을 이룬 것은 소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의견이 갈리기도 했다.
워크맨 첫 작품 TPS-L2. 움직이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당시 산업과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소니가 뽑은 20세기 워크맨
BEST & WORST
BEST NWZ-A844
2010년 4월 출시 / 2.8형(7.01cm), OLED 컬러 디스플레이 / MP3, WMA, AAC-LC, Linear PCM / 42.7 × 94.2 × 7.5 mm / 62g
디지털 앰프와 깔끔한 노이즈 캔슬링을 통한 깨끗한 소리로 호평을 받았다. 높은 출력이 필요한 비싼 수신기도 무리 없이 소화해 마니아의 반응도 좋은데다 음질이 좋으니 금상첨화. 오래가는 배터리도 장점이다.
WORST NWZ-W202
2009년 4월 출시 / MP3,WMA,AAC / 125 × 112 × 20 mm / 35g
음악을 들으며 운동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 이어폰 일체형 MP3 플레이어. 혁신적인 디자인이지만, 땀을 흘리면 부식되는 문제가 생겨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생활 방수 기능을 더해 W시리즈로 다시 나왔다.
테이프, CD, MP3 ……
2010년 4월 말, 소니는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하는 워크맨 생산을 공식적으로 중단했다. 워크맨은 소니 음향장치 브랜드 이름으로 계속 살아있지만 초기 모습을 간직한 워크맨은 사라진 셈이다. 워크맨 31년사를 살피면 국내외 음악시장 발전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첫 작품인 TPS-L2를 뒤를 이은 건 1981년 만들어진 워크맨Ⅱ, 사실상 워크맨의 원조라 불리는 ‘WM-2’다. WM-2는 전작에 비해 소리가 좋고, 금속 옷을 입혀 대중성을 높였다. 30년 동안 나온 워크맨 중에서도 판매 성적이 상위권이다. 이후 카세트 세로 넣기, 리모콘 얹기 등 생김새 변화부터 이퀄라이저, 양면 자동 재생 등 다양한 기능까지 두루 적용한 워크맨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니만 해도 1982년 12개, 1992년 25개 등을 내놓았고 다른 제조업체들도 미니 카세트 시장에 뛰어들어 시장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워크맨의 초기 열풍이 워낙 거셌고 제품을 오래 쓰는 사람이 많아 전성기가 긴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카세트테이프 워크맨 위기는 1980년 후반부터 찾아오기 시작했다. 음반 시장에 CD라는 새로운 방식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1982년 소니, 필립스, 폴리그램 등 주요 레코드 회사 주요 인물들이 모여 CD의 최종 크기를 확정했다. 1982년 11월 그룹 ‘아바(ABBA)’의 앨범 ‘The Visitors’를 시작으로 디지털 음악이 시작됐다. 1990년대부터 대중화되긴 했지만 CD는 좋은 소리를 앞세워 워크맨의 자리를 넘봤다.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인 CD를 원하는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 소니도 CD플레이어를 만들었다. 소니에서 처음 만든 CD 플레이어 ‘CDP-101’은 몸집이 크고 몸값도 비싼 편이라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진 못했다. 소니는 2년여의 노력 끝에 1984년 워크맨 때와 마찬가지로 CD 크키만큼 몸집을 줄인 D-50을 만들어낸다. D-50 이후 만든 CD 플레이어에는 워크맨 대신 ‘디스크맨’이란 이름이 붙었다. 고급형과 보급형이 다양하게 나오면서 워크맨 자리를 위협했지만 CD는 테이프에 비해 값이 비싸고 플레이어 무게와 값이 만만치 않아 워크맨의 자리를 단숨에 빼앗지는 못했다. 진짜 무서운 상대는 MP3 플레이어였다.
인터넷은 1995년 이후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고, 우리나라도 1990년 후반부터 MP3 플레이어 개발사들이 늘어났다. 1997년에는 국내 기업 엠피맨닷컴이 세계 최초로 MP3 플레이어를 만들어 주목을 받았다. 2000년대 초중반 이후 MP3 플레이어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미니카세트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소니도 ‘네트워크 워크맨’이라고 이름 붙인 MP3 플레이어를 내놨다. 1999년에 나온 네트워크 워크맨은 메모리스틱을 얹은 제품으로 디지털 음원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용량과 배터리 량이 부족했다. 게다가 소닉스테이지라는 전용 프로그램 통해서만 파일을 보낼 수 있어 소비자 층이 한정 되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예전 워크맨 인기 같은 충성 지지를 기대했지만 이미 미국에선 애플, 국내에선 아이리버와 코원 같은 회사들이 치고 나와 열성팬이라도 소니에만 눈을 두긴 힘들었다. 2007년 쯤 NWD, NWZ 등 다른 제품과 견줄만한 재주와 편의성을 갖춘 제품이 나왔지만 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소니의 첫 CD플레이어 CDP-101. 몸집이 크고 값이 비싸 관심에 비해 판매량이 좋진 않았다. 이후 CD플레이어 크기가 작아지면서 ‘디스크맨’이란 이름이 붙었다.
정통성 VS 빛바랜 영광
1999년 워크맨 20살 생일까지는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워크맨은 시대 변화에 적응이 느렸다. 휴대용 오디오 시장에서 조건반사적으로 ‘소니’를 찾는 마니아들을 너무 믿은 탓일까. 결국 소니는 ‘워크맨’하면,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 이름이고 소니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는 ‘정통성’과 예전 휴대용 카세트만 떠올리게 한다는 ‘빛바랜 영광’이란 의견으로 대립했다. 결국 소니는 워크맨을 살리고 제품 라인업은 새로 잡는 구성을 선택했다.
이제 워크맨은 특정 제품 명칭이 아닌 모든 소니 음향 제품의 대표 브랜드인 것이다. 국내에서는 액세서리처럼 옷에 착용할 수 있는 ‘W 시리즈’와 자사 최초의 풀터치 방식 모델 ‘X 시리즈’ 등 총 5가지 콘셉트로 나눈 MP3 플레이어가 옛 명성 찾는데 주력하고 있다. 애플 진영에 맞서기 위해 휴대전화와 게임을 결합한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이르면 7월 프로젝트팀을 구성하고, 휴대용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포터블(PSP)과 소니에릭슨 휴대폰의 기능을 결합한 ‘게임 휴대폰’을 내놓을 계획이다.
소니 코리아 관계자는 “개인용 휴대 음향기기 시장을 창출한 그 혁신적인 경험을 느낄 수 있는 제품개발에 주력할 것”이라며 휴대용 오디오 장치 판도를 다시 한 번 바꿀 기대를 밝혔다.
워크맨 20주년을 맞아 그동안 나온 워크맨 제품들은 한데 모은 스티커.
지금은 생산을 중단한 카세트테이프 워크맨 정보를 영어로 담아놓은 담아놓은 ‘워크맨 박물관’(pocketcalcula torshow.com/walkman). 소니의 다양한 제품은 물론 샤프, 산요 등의 다른 회사 휴대용 카세트 제품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