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제임스 본드는 뛰어난 얼리어댑터! - 영화에 담긴 IT 기술 발전사

2012-05-12     PC사랑

1895년에 만든 세계 최초 영화 <열차의 도착>은 단지 기차역에 도착하는 열차를 보여줬을 뿐인데 관객들을 혼비백산했다. 당시는 관객들이 현실과 영화를 구분할 만한 지식과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비추는 일에만 머물렀다. 현실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902년 당시 유럽 최고 ‘구경거리’였던 조루주 멜리에 감독의 <월세계 여행>부터다. 60년이 지난 1969년에야 이뤄졌던 달 착륙을 영화 속에 그려내며, 영화적 상상력이 얼마나 큰 폭발력을 발휘하는지 증명했다. 게다가 극장 직원이 유출한 프린트로 영화의 엄청난 흥행에도 불구하고, 제작자이자 감독이었던 조루주 멜리에가 파산한 점을 떠올리면, 모든 정보 기술이 두려워하는 불법 복제 폐해까지도 미리 예견한 영화라 볼 수 있다.  

<메트로폴리스>에 인공지능 로봇 등장
IT 기술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는 최첨단 기기가 등장한 작품은 SF 고전 영화 <메트로폴리스>다. 프리츠 랑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미래 도시 인간은 기계문명에 종속된 부속품 신세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어두운 미래를 그리는 영화의 핵심 캐릭터는 인공지능 최첨단 여성 로봇 ‘헬’(HEL)이다. 이 영화를 제작한 1927년이 미국 의회가 최초로 무선 통신법을 만든 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획기적인 발상이다. 무선은 물론, 인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가공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헬은 당시 관객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헬은 이후에 만들어진 수많은 SF영화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R2D2’와 함께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대표 로봇 캐릭터로 자리잡은 ‘C-3PO’의 첫 출발점이기도 했다.

1930~40년대를 거치며 수많은 영화가 등장하며 하나의 문화 사업으로 자리잡았지만, <메트로폴리스>가 상상한 기계문명의 세계를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진 않았다.

1950년대에는 냉전과 공산주의 속 대중의 공포를 밑거름으로 외계인의 지구 침공이나 우주전쟁 등을 주제로 한 영화가 많았지만, 역시 <메트로폴리스>를 능가할 만한 과학기술을 상상하지 못했다. 낚싯줄에 매단 비행접시 모형을 하늘에 날리는 수준의 조악한 특수효과 기술로는 창작자의 상상을 영상으로 완벽히 표현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만한 작품이 1956년에 나온 <금지된 행성>이다. 비록 이 영화가 상상한 만능 로봇 ‘로비’는 <메트로폴리스>의 ‘헬’ 보다도 떨어지는 생김새지만, 우주인의 특수 캡슐과 무선통신기기는 1966년에 시작한 TV시리즈 <스타트렉>의 ‘빔다운&업’시스템에 영감을 줬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금지된 행성>의 무선 마이크는 오늘날 플립형 휴대전화의 등장을 예고한 <스타트렉>의 연결고리가 되었고, 캡슐 시스템은 데이터와 물건, 인간까지 전송하는 빔다운&업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사실 <스타트렉> 에피소드 시리즈 대부분에 등장하는 이 핵심 기술은 우주선 착륙을 촬영할 세트 제작비를 아끼려고 만든 기술이었지만, 단순 정보의 쌍방향 전송조차 쉽지 않았던 1960년대 발상치고는 무척 놀랍다.  





007 시리즈는 최첨단 기기 전시장
IT 기술을 중점으로 보면 1960~70년대는 제임스 본드 활약에 주목하면 된다. 지금도 그렇듯 007 시리즈는 최첨단 기기 전시장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게다가 007 시리즈에 등장한 각종 통신기기들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황당한 수준이 아니라, 조만간 쓰일 법한 제품이었기에 관객의 기대와 호기심은 더 높았다. 

1963년에 만든 두 번째 007 시리즈 <007 위기일발>에는 1990년대 중반에 전성기를 누린 무선 호출기, 일명 ‘삐삐’가 등장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름다운 풍광이 빛나는 강변에서 본드걸과 밀회를 즐기던 제임스 본드는 ‘삐~, 삐~’ 소리가 울리자, 양복 상의를 뒤진다. 호출을 알리는 소리는 물론,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생김새까지 1990년대 등장한 ‘삐삐’를 쏙 빼닮았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본부의 호출을 받은 제임스 본드가 본드걸의 유혹을 뿌리치고 향한 곳은 자신의 자동차다. 당시 관객이라면 당연히 본드가 폼 나게 차를 몰며 전화를 걸 수 있는 리조트로 향하리라 예상했을 터. 하지만, 본드는 차에서 ‘폼 안 나게’ 검은 색 수화기를 집어 든다. 바로 ‘카폰’의 등장이다. 당시 관객들은 잘 몰랐을 테지만, 카폰은 1946년 모토로라에서 이미 개발을 마친 상태였다. 비록 10kg에 이르는 무게와 한국전쟁 시절의 군용 무전기를 능가하는 거대(?) 장비였을지라도, 현대 휴대전화의 시작은 이 영화가 나오기 한참 전에 이미 개발을 마쳤다. 다만 <007 위기일발>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을 뿐이다.

사실 크기와 무게는 모바일 통신의 핵심 기술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닌 기기라도 몸에 지닐 수 없는 제품은 ‘모바일’이라 부를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다음 해에 만들어진 <007 골드핑거>에는 보청기 크기의 통신기기가 등장한다. 악당이 도박판에서 상대방의 패를 파악하는 수단으로 쓴다. 요즘 관객이라면 음성 수신만 되는 단방향 통신 기기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도 당시에는 쉽게 상상하기 힘든 기술이었다. 영화 속 사기도박의 희생자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007 골드핑거>에 등장하는 소형 통신기기는 또 있다. 악당의 소지품에 몰래 숨길 수 있는 새끼손가락만한 전파 발신기와 명함 크기만한 차량용 발신기다. 위치 추적용 수신기는 자동차에 달려있었다. 오늘날 위성을 이용한 GPS 추적 장치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본 아이덴티티>로 시작한 본 시리즈가 증명하듯이 오늘날의 제임스 본드라면 상대방의 휴대전화나 손톱보다 작은 GPS 추적 장치를 이용했겠지만, 당시에는 이 같은 전파 발신기만으로도 충분히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기술이 진보하면 상상력도 확장된다. 1967년에 나온 <007 두 번 산다>의 제임스 본드 자동차에는 영상 통화 기능이 더해진 카폰이 달렸다. 제임스 본드는 자동차에서 카폰으로 멋지게 영상 통화를 하지만, 최첨단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카폰이 뒷좌석 시트에 달려있어 있어서 사진처럼 고개를 돌리고 통화해야했다. 이는 도요타 자동차의 과욕 때문이었다.

당시 도요타 자동차는 이 영화에 등장한 차와 같은 옵션을 얹은 차를 팔기 위해 흉내만 내는 영화용 자동차가 아닌 판매용 자동차를 직접 촬영에 이용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기술적 한계로 덩치 큰 카폰을 앞좌석이 아닌 뒷좌석에 설치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제임스 본드의 기묘한 통화 포즈는 과도한 PPL이 영화를 망친 사례로 거론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마저도 최첨단 기술이었으니, 특별히 트집 잡힐 일은 아니었다.

007 시리즈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쓰일 첨단 장비 소개에 전력을 기울이던 1960년대에 영화 속 IT 기술 인식을 바꾼 명작이 탄생한다. 바로 SF 영화의 전설이라 불리는 1968년 작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음성 인식 보안장치는 디지털 시대 예고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런 디지털 장비 이용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상상 속에서 나온 게 아니다. IBM이  집적회로(IC: Integrated Circuit) 기억장치 구성소자를 이용해 만든 제3세대 컴퓨터 ‘system 360’을 팔기 시작한 게 1964년 4월이었으니, 영화 속 음성 인식 보안장치가 아주 허무맹랑한 장비는 아니었다. 게다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영상 통화 역시 1년 전 <007 두 번 산다>에 이미 등장한 기술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독보적인 상상력은 디스플레이 장비를 표현한 장면에서 드러난다. 영화 속 음성 인식 보안장치 모니터를 주목해보자. 1968년엔 일명 ‘배불뚝이 브라운관 TV’라 불리는 CRT 모니터 이외의 다른 화면 장치를 상상하기 어렵던 때였다. 스탠리 큐브릭은 교묘한 세트와 특수 촬영 기법을 활용해서 모니터가 평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LCD나 LED 평면 모니터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게다가 오늘날 항공기 좌석에 달린 화면 장치를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우주선 좌석에 단 작은 화면 장치를 통해 승객이 영화보는 장면을 담았다. 디스플레이 제품 변화는 물론 이용법까지 예견한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음성 인식 보안기술은 1971년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서 음성 변조 기술로 진화한다. 요즘이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하나면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간단한 기술이지만, 당시에는 제임스 본드 급의 첩보 요원만 쓸 수 있는 고급 기술이었다.

<007 죽느냐 사느냐>는 휴대용 통신기기가 처음으로 등장한 영화다. 이 영화를 만든 1973년은 모토로라가 휴대전화를 처음 개발한 시기라 영화 속 휴대전화 등장은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는 이 장치를 통해 본부와 통화를 시도하려다 도청을 눈치 채고 모스 부호 전송 방식으로 바꾼다. 때문에 아쉽지만 <007 죽느냐 사느냐> 속 통신기기가  휴대전화와 비슷한 방식으로 설정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모스 부호를 이용해 문자를 보내는 기능과 음성 통신 기능이 합쳐진 새로운 통신기기가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77년 <007 나를 사랑하는 스파이>에는 문자만 받을 수 있는 시계형 통신 장치가 등장하는데, 우습게도 텔렉스 형이다. 1970년대에 문자 메시지를 송수신 할 수 있는 통신 기기는 중간에 교환 작업이 필요해 인쇄 전신기를 이용하는 ‘텔렉스’ 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구나 요즘 휴대전화에서 쓰는 SMS 문자 메시지를 처음 개발한 게 그로부터 8년 뒤인 1985년이었으니, 아무리 디지털 시계였다고 해도 디스플레이 기술이 초보 수준이었던 당시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디지털시계와 텔렉스의 결합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 보면 조금 우스운 시도였지만, 007 시리즈가 IT 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적지 않다. 특히 기기 융합은 007 시리즈가 일관되게 선보인 기술이다. 가장 유용한 제임스 본드의 융합형 기기는 단연 시계였다. 악당에 붙잡힌 제임스 본드는 항상 시계에 얹은 특수 기능을 이용해 탈출 했으니 말이다. <007 죽느냐 사느냐>에서 첫 선을 보인 특수 시계는 강력한 자석으로 변하거나 탈출용 전동 톱니가 튀어나오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IT 기술 발전에 따라 <007 옥토퍼시>에서는 GPS 추적 장치와 카메라 기능이 달린 모델을 썼다. 물론 제임스 본드는 Q박사의 의도와는 달리 자신의 개인 취향대로 시계를 쓰는데 열중했지만…….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제임스 본드 시계는 007 시리즈의 독보적 융합형 특수 장비 역할을 한 휴대전화에 내주고 만다. 90년대는 휴대전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였으니 당연한 결과다. 1997년에 나온 <007 네버다이>에서 본드가 쓴 휴대전화에는 지문 스캐너에 전기 충격 기능, 자동차 무선 리모콘 기능까지 더해졌다. 휴대전화가 필수 소지품이 되면서 생긴 변화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최첨단 IT기술을 적용한 특수 장비를 독점적(?)으로 선보이던 007 시리즈 역할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다. 모바일 기기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끈 소니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워크맨’을 시작으로, IT 기기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면서 다양한 영화에서 IT기기가 소품으로 등장한 탓이다. 007 시리즈의 독보적인 위치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시작은 1982년에 나온 <블레이드 러너>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만큼 영향력 있는 걸작 <블레이드 러너>는 2019년의 LA가 배경이다. 이 영화는 암울한 미래도시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사이보그의 대립을 통해 인간 존재가 무엇이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 완성도와는 별개로 <블레이드 러너>에서 쓴 IT 소품들은 그리 뛰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첫 장면에 등장한 동공 인식 장치는 생김새에 비해 정보처리 능력이 떨어졌고, 주인공 컴퓨터도 단순 스캐너 기능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영상 통화 장치 역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보다 오히려 퇴보한 수준의 화면 장치를 선보였다. 앞서 말했듯이 스탠리 큐브릭이 절묘한 촬영기법으로 평면 디스플레이 기기를 창조해낸 반면, <블레이드 러너>는 여전히 배불뚝이 브라운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음성 인식 보안장치 또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장치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광고판으로 쓰인 대형 디스플레이 기기다. 오늘날 고층 빌딩 옥상을 점령한 대형 전광판 존재를 예측이라도 한 듯 각종 일본 제품을 광고하는 대형 디스플레이 광고판을 영화 곳곳에 배치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광고가 일본 제품이고, 영화의 소품과 세트 역시 일본풍이란 점이다. 그것은 1980년대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것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 IT 기기가 전 세계를 석권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제품 공습은 전 세계 시장을 초토화할 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일본 대기업들이 미국 빌딩들을 거침없이 사들였다. 따라서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는 일본의 경제 역습을 두려워하는 미국인의 심리가 반영된 장면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모바일 기기의 발전은 SF영화 소품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83년 모토로라에서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 ‘다이나텍’ 판매를 시작하자 휴대용 통신제품은 더 이상 신기한 소품이 아니었다. 일상에서 쓸 수 있는 기기를 미래 사회에서 이용할 수는 없는 법. 이때부터 영화는  IT 기기를 통해 만들어진 네트워크에 집착하게 된다.

전자 제품 대중화와 디지털 시대 개막은 필연적으로 ‘기계에 종속된 인간’이라는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철학을 되새김질하게 만들었다. 그저 상상 속에서 존재하던 세계가 IT 기술의 발전으로 현실이 되면서 존재론적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간이 컴퓨터 프로그램 속으로 들어가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간다는 설정은 더 이상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최근에 리메이크된 1982년 작품 <트론>이 바로 그런 상상을 영상으로 옮긴 최초의 영화였다.

영화 <스캐너스> <플라이> <크래쉬> 등을 통해 생물학적 호러 장르를 창조한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1983년 <비디오 드롬>을 통해 인간의 육체와 비디오 기기가 물리적으로 결합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실사로 표현해 평단과 관객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물론 최첨단 IT 기술과 인간의 결합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작품도 있었다. 1987년에 나온 <로보캅>은 인간의 신체에 로봇 공학 기술과 IT 기술을 접목시켜 만들어낸 사이보그 경찰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다른 영화가 온전히 금속으로 만든 로봇이거나 인간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의 사이보그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머물러 있을 때, 인간과 로봇의 장점을 한 몸에 갖춘 <로보캅>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 위치 인식기술을 활용한 정밀 사격은 <로보캅> 만의 독보적인 능력이었다.  








보안 장치는 왜 70년대 초에 자주 등장했을까?
보안기술에 관심 있다면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 등장한 초보 수준의 지문 인식 장치와 다음 시리즈인 <007 죽느냐 사느냐>에 쓰인 도청 감지기를 주목하자. IT 기술이 적용된 보안 장치가 왜 하필 70년대 초에 자주 등장했을까?
공교롭게도 1971년은 보안 장치가 IT의 또 다른 핵심 기술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해다. 사건은 미국 수의사 존 드라퍼가 ‘캡틴의 곡물 크런치’(Captin’s Crunch cereal boxes)를 사고 덤으로 받은 피리에서 시작한다. 존 드라퍼는 피리가 2600Hz의 소리를 내고, 이를 전화기에 대고 가볍게 불면 공짜로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이 사실을 반문화 운동가인 아비 호프만이 널리 알리며 유행처럼 번져 많은 사람이 활용했다. 결국 전화 회사는 공짜 통화를 막으려고 보안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보안 장치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모바일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영화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IT 기술을 받아들였다. 가장 획기적인 설정을 한 영화는 아직도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뇌과학을 IT 기술과 접목시킨 1990년 작 <토탈리콜>이다. 인위적으로 가공한 데이터를 인간의 뇌에 주입시켜서 가짜 기억을 만들어낸다는 설정은 영화 완성도와는 별개로, 현재까지도 많은 영화에 반복적으로 쓰이는 단골 주제다. 이런 설정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뇌 속에 잠재되어있는 기억마저도 마음먹은 대로 데이터화 시킬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이 같은 상상과 네트워크 개념을 결합한 영화가 바로 <론머맨>이다.

고밀도 집적회로(large-scale integration, LSI)를 이용한 4세대 컴퓨터에서 시작해 초고밀도 집적회로 (Very-large-scale integration, VLSI)로 만든 5세대 컴퓨터로 넘어오며 컴퓨터 그래픽 분야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그래픽 기술 발전으로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 세계를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92년에 나온 <론머맨>은 컴퓨터가 창조한 가상현실과 쾌락 중추를 자극해 ‘사이버 섹스’를 경험한다는 내용을 최초로 영상에 옮긴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에 나온 가상현실은 인간이 육체를 버리고 의식을 네트워크로 옮겨 괴물로 변화는 영화적 설정에 날개를 달아줬다.

1991년에 만들어진 <터미네이터>는 <메트로폴리스>의 여성 로봇 ‘헬’과 <블레이드 러너>의 사이보그를 결합해 ‘파괴자 로봇’으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면서까지 그토록 없애고 싶어 했던 ‘인공지능 칩’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뛰어넘는 무서운 존재라는 공포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로보캅’은 인간의 뇌가 있었기에 선과 악, 사랑과 양심을 본능적으로 체득할 수 있었던 반면, 영화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하고 파괴적인 로봇 캐릭터인 ‘터미네이터’는 인간의 뇌를 대신하는 인공지능 칩을 달았기에, 그 모든 도덕적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괴물’이 될 수 있었다.

1995년 작품 <코드명 J>에 이르면 인간의 뇌를 저장장치로 전락시킨다. 2021년에 살고있는 주인공 조니는 실리콘 칩 메모리 확장장치를 뇌에 이식해 방대한 데이터를 저장하고 전송할 수 있는 인물이다. 당시는 1.44MB 수준의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쓰던 시절이니, 요즘과 같은 대용량 메모리 저장장치나 전원공급없이 메모리를 저장하는 낸드 플래시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인간의 뇌를 대용량 저장장치로 이용하는 설정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는 영화적 배경인 2021년을 무려 10년이나 남겨둔 2011년에, 테라바이트 수준의 저장장치를 일반인들이 쓸 거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도 <코드명 J>가 남긴 IT 기술 유산은 결코 적지 않다. 영화 속 주인공 조니가 네트워크에 침입해 방화벽을 뚫는 과정에서 안경처럼 머리에 쓰고 영상을 즐길 수 있는 차세대 디스플레이 장비 ‘HMD’ (Head mounted Display)와 데이터 글러브를 착용했기 때문이다. <코드명 J>에서 쓰인 데이터 글러브는 2002년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빛을 발한다. 

1997년 나온 <가타카>는 인간의 DNA를 데이터로 활용하는 설정으로 유명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DNA는 보안장치를 통과하는 열쇠이자, 직업 선택의 연결 도구, 배우자 결정 기준으로도 작용한다. DNA 정보와 IT 기술의 결합이 가져올 사회적 재앙을 모두 드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자체가 미래에 모든 사회구성원의 DNA 정보를 네트워크에 등록하고, 이를 사회적 선택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전체주의 사회와 다를 바 없는 어두운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영화기 때문이다.

IT 기술을 통제와 억압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권력자의 야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영화는 1998년에 나온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다. 영화는 부패한 권력기관이 자신들의 비밀을 손에 쥔 주인공을 추적하려고 도시 곳곳에 설치한 IT 장비와 인공위성을 활용하는 모습을 정밀하게 묘사했다. 사실 권력자가 네트워크를 이용해 개인을 철저히 유린하는 모습은 1995년 <네트>에서 이미 다뤘던 소재다. 그럼에도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가 신선했던 이유는 1995년 4월부터 일반에게 개방된 GPS 추적 장치의 어두운 단면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GPS 기반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오빠 믿지>의 폐해(?)를 미리 내다 본 작품일지도 모른다.

네트워크 시스템의 부정적 이용은 2007년 <다이하드 4.0>에서 좀 더 과감히 나타난다. 해커들이 정부의 네트워크 시스템에 침투해 교통, 전기, 금융 등을 마비시키는 일은 실현 불가능한 설정이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농협 전산망 사태가 증명하듯 언제, 어디서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2008년 <다크나이트>는 한 발 더 나아가 주인공 배트맨이 고담시의 개인용 휴대전화를 모두 해킹해, 도청장치로 활용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만약 누군가 세상의 모든 IT 기기를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면, 절대 권력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1999년에 나온 <매트릭스>는 네트워크에 대한 이분법적 태도를 버린 작품이다. <매트릭스> 이전의 영화는 <트론>처럼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모두 네트워크로 흡수되거나, <론머맨>처럼 육체와 완전히 분리된 의식이 네트워크에 떠다니는 설정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매트릭스>는 필요에 따라 의식만을 네트워크에 흘려보내는 방식을 이용했다. 거기에 이미 수많은 영화에서 도입했던 ‘기계들의 반란’이라는 설정을 더해, 존재론이라는 고전적 테마까지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영화 <매트릭스>는 사실상 <메트로폴리스>부터 70여 년간 이어져온 SF영화의 철학적 개념과 디스토피아*적 미래관의 총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 영화는 화려한 디스플레이 제품에 집착한다. 크기와 모양 제약이 거의 사라진 디스플레이 기술의 발전 덕이다. 2002년에 나온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다양한 디스플레이 기술을 영화 배경으로 끌어들였다. 예지자들의 뇌파를 영상화 시키는 기술을 기본 설정으로 데이터 글러브와 투명 디스플레이는 물론, 평면을 넘어서 마음대로 휘어지고 구부릴 수 있는 디스플레이 제품들을 영화 곳곳에 배치했다. 영화의 주요 설정 중 하나인 홍채 인식 기술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시각적 쾌감에 집중했다.

사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기술은 이미 제품에 적용했거나, 개발이 완료된 기술들이다. 가까운 미래에 실현 가능성이 적은 기술은 뇌파를 영상으로 바꾸는 기술 정도다. 이런 설정이 현실이 되면 세상의 모든 배우들은 직업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누구나 상상만 하면 카메라와 배우 없이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될 테니 말이다.

2009년 3D 열풍을 몰고 온 <아바타>는 인간의 의식을 디지털 신호로 바꿔 아바타를 조종하는 미래 사회가 배경이다. 인간이 IT 기술을 활용해 또 다른 자아를 조종하는 개념은 1958년 세계 최초의 게임이 만들어졌을 때 이미 정착한 것이다. 하지만 <아바타>는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 그 체험치를 극대화 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다만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선보인 투명 디스플레이를 능가하는 기술적 진보를 담아내지 못한 점은 조금 아쉬운 대목이다.

투명 디스플레이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화는 따로 있다. 2004년에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 <코드 46>은 투명한 유리창이 터치스크린 기능을 갖춘 모니터가 되는 모습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e북이나 e페이퍼를 보여주는 기기까지 등장하니 투명 디스플레이 기술을 실생활에 적용한 모습이 보고 싶다면 <코드 46>이 제격이다.

2010년 <아이언맨2>에서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데이터 글러브도 없이 맨손으로 레이저를 이용한 홀로그래피 영상을 자유자재로 디스플레이 시킨다. 컴퓨터 감지 센서는 스타크의 움직임에 반응해 홀로그램 영상을 띄우고, 인간의 손짓이나 목소리에 따라 홀로그램을 움직이고 흩어지게 한다. 이 같은 고감도 작동 감지 센서에 음성 인식 기능까지 더해진 <아이언맨2>의 홀로그래피 기술을 능가할 만한 디스플레이 장비가 머지 않은 미래에 나올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물론 홀로그래피 영상은 <아이언맨2>가 처음 선보인 기술은 아니다. 홀로그래피 영상은 무려 30여 년 전인 1977년, 전 세계를 열광하게 만든 영화 <스타워즈>에서 이미 쓰인 기술이다. 걸작이라고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2011년 2월, 미국에서 흥미로운 실험이 공개적으로 펼쳐졌다. IBM 슈퍼컴퓨터 왓슨이 어렵기로 유명한 퀴즈쇼 ‘제퍼디’에서 두 명의 챔피언과 퀴즈 대결을 벌여,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주목할 점은 컴퓨터가 인간의 음성을 인식한 뒤, 단 몇 초 만에 15조 바이트 분량의 방대한 정보를 분석해 정답을 찾아내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아직은 영화 속 인공지능 컴퓨터에 비교할 만한 수준이 못될지라도,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기 시작한 컴퓨터의 등장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어디 그뿐인가. 5월 개봉하는 <소스코드>는 시공간을 초월해 인간의 의식을 과거로 돌려보내는 설정을 담고 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1985년의 <백 투더 퓨처> 주인공 마티처럼 천재 과학자가 만든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게 아니다. 뛰어난 컴퓨터 프로그래밍 기술을 통해 시간을 여행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영화의 긴장감을 높이려고 사망 직전 8분간만 여행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어있지만, 최첨단 IT 기술과 물리학이 결합해 간단 메시지라도 과거로 보낼 수 있는 시대가 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화 <소스코드>의 내용처럼 대형 참사를 막을 수도 있고, 개인의 예정된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라면 어떤 메시지를 과거의 당신에게 보내고 싶은가? 아무래도 숫자 6개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듯 싶다.     







한국영화 속 IT 기술

천사몽


바이오맨


예스터데이

한국형 SF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한국의 IT 기기들은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면 소개할 영화가 없는 비극적 운명에 처한다.   
한국영화계에서 SF 장르는 비인기 분야다. 다른 장르에 비해 많은 제작비가 쓰이는 특성이 반영된 결과로,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 SF 영화는 어린이용으로 만든 <우뢰매>가 유일했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1988년 박중훈 주연의 <바이오맨>이 만들어지긴 했으나, 미국 드라마 <육백만 불의 사나이>의 설정을 빌려왔을 뿐, 미래형 기기가 등장하는 SF 영화라고 보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러다 1990년대 한국영화의 대격변이 시작되고 대기업이 앞 다퉈 몰려들던 시절을 거쳐, 21세기로 접어들자 드디어 한국에서도 거대 예산이 투입된 SF영화가 만들어진다.

여명과 이나영이 출연한 2001년 작품 <천사몽>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천사몽>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기본 설정이 무색할 만큼 참담한 수준의 소품과 컴퓨터 그래픽을 보여줬고, 딱히 소개할 만한 IT 장비 하나 남기질 못했다.
2002년 <성냥팔이의 재림>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해에 만들어진 <2009 로스트 메모리스>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삼은 까닭에 영화를 제작한 2002년 기술 수준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터라 역시 거론할만한 장비가 없다.

가장 괄목할 만한 기술적 수준을 보여준 작품은 남북이 통일한 2020년 미래가 배경인  <예스터데이>다. 2002년에 만든 김승우, 최민수 주연의 <예스터데이>는 영상 통화가 가능한 목걸이형 휴대전화와 카폰, 말벌 모양의 스파이 카메라 등 최첨단이라고 부를만한 장비들을 적절히 배치한 한국 최초 SF영화다. 무엇보다도 영화를 돋보이게 만든 IT 장비는 태블릿 PC였다. 들고 다니는 PC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북한 크기지만, 태블릿 PC의 등장을 미리 예견했다는 점에서 보면 놀라운 상상력이다.

2003년에 만들어진 <내츄럴시티> 역시 시계형 휴대전화와 영상 통화 장치를 기본으로, 홀로그래피 광고판 등, 시선을 끌만한 IT기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돔 형식의 홀로그램 영상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술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2001년부터 3년 동안 제작된 한국형 SF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한국영화계에서 SF는 금단의 장르가 되어 버린다. 결국 오늘날 세계 최고 수준이라 불리는 한국의 최첨단 IT 기기들은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면 소개할 영화가 없는 비극적 운명에 처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