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게임 - 부루마불

2014-01-30     PC사랑
 
우리는 전 세계 부동산을 사고팔며 놀았지

부루마불
 

재벌 2세의 이야기가 아니다. 1933년 미국의 찰스 대로우가 만든 보드게임 ‘모노폴리’는 공식적으로는 8세 이상이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1982년 한국의 씨앗사에서 출시한 최초의 한국 보드게임 ‘부루마불’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대표적인 가상 공인중개사 체험 게임이다.

정환용 기자
 
 
정식 발음은 ‘블루마블 - Blue Marble’이 맞지만 ‘부루마불’이 고유명사처럼 사용됐으니 교과서적인 부분은 넘어가자.
 
 

부루마불의 전신 ‘모노폴리’ 역시 1937년 이후 현재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수많은 보드게임들을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방은 한 때 PC방을 뒤이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보드형, 카드형, 타워형 등 종류별로 가지각종 베스트셀링 게임들이 있는 보드게임방을 찾으면 여기저기서 환호, 혹은 탄식과 함께 뿅망치 소리가 울부짖곤 했다.
3열로 쌓아올린 블록을 빼내는 ‘젠가’나 동물적 순발력이 요구되는 카드게임 ‘우노’부터 제한된 정보로 범인의 알리바이를 밝히는 ‘클루’, 본격 브레인스토밍 땅따먹기 ‘세틀러 오브 카탄’까지 보드게임의 종류는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무척 다양하다. 쉽고 빠르게 친구의 헤어스타일을 망쳐주는 게임부터 노트에 필기까지 해가며 머리를 쥐어뜯어야 하는 어려운 게임까지 수백 가지의 보드게임들은 PC나 콘솔 게임과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엄연한 게임의 한 장르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보드게임도 쉬운 게임과 어려운 게임으로 나뉜다. 산수를 마스터했다면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는 ‘로보77’은 쉬운 게임에 속하고, 상대방 패의 숫자를 흑백 컬러와 순서만으로 맞춰야 하는 ‘다빈치코드’는 어려운 게임에 속한다(물론 계산기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당신에게는 둘 다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에 비하면 부루마불은 처음 배우고 즐기기는 어렵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방의 재산을 탕진할 전략을 세우고 빠른 눈치로 상대의 의도를 읽어야 하는 고난이도 게임이기도 하다. 모든 사물이 그렇듯이 부루마불도 상당한 차이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휴양지에서 우정파괴 배틀로얄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루마불의 룰은 매우 간단하다. 두 개의 육면체 주사위로 2에서 12까지의 숫자를 뽑아 시계 방향으로 총 40칸으로 이뤄진 세계를 누비며 부동산 놀음을 하면 된다. 시작할 때 주어지는 일정 금액의 자금을 가지고 자신만의 전략으로 세계 각국의 도시들을 사들이며 재산을 불리고 상대방을 ‘파산’시키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다. 이 게임의 권장 연령층이 8세 이상이니 초등학교에서 친구들과 이 게임을 즐겨봤다면, 부동산에 대한 당신의 관심은 이미 유년기 시절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게임 초반에는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동아시아 지역부터 공략하기 시작한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고가의 유럽, 미주 지역으로 진출해 별장과 빌딩, 호텔을 지어 땅값을 올린다. 일부 책임감이 투철한 친구들은 부산, 제주도 등 우리나라의 도시에 눈독을 들이기도 한다. 빌딩과 호텔을 지어둔 프랑스 파리에 친구가 놀러 왔다면 기쁜 마음으로 거액의 통행료를 뜯어낸다. 돈이 없다면 가지고 있는 건물이나 도시를 팔아서라도 갚아야 한다. 세계를 한 바퀴 돌 때마다 ‘씨앗은행’에서는 월급도 준다. 진정한 범국제적 부동산 매매 스페셜리스트 육성 게임이다.
 
게임에서 1등을 한 사람은 자기 앞에 쌓인 도시매매계약서(게임 내에서는 ‘증서’로 불린다)와 수많은 현금들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까? 어렸을 때는 그저 ‘와 내가 이겼어 하하’에서 끝났지만, 최근 스마트폰이나 온라인 게임 버전으로 다시 해 보니, 마치 세계가 내 손아귀에 놓인 것처럼 묘한 뿌듯함이 생기기도 했다(그렇다. 기자는 현실에 찌들었다.). 친구가 계속해서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다 해서 배 아플 필요는 없다. 부루마불은 더 많은 도시를 가지는 것만이 승리의 조건이 아니다. 40칸의 세트 중에서는 컬럼비아 호, 무인도, 우주정거장 등 도시가 아닌 곳도 있고, 무엇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우리를 그토록 설레게 만드는 ‘황금열쇠’가 게임 최대의 변수이다. 내가 가진 가장 비싼 도시를 헐값에 강제로 팔아넘겨야 하는 ‘반액대매출’부터, 부루마불 최고가의 도시인 ‘대한민국 서울’에 걸려 200만원이라는 거금을 빼앗겨야 할 때, 당당하게 내미는 무사통과 비장의 카드 ‘우대권’까지 참가자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다양한 카드들이 게임의 승자를 섣불리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아직도 출시되고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는 부루마불은 가장 저렴한 원래의 버전에서 약 3~4만 원대의 클래식 버전까지 약 6종류가 나와 있다. 크기로 따지면 초기 버전의 보드의 크기는 400 x 400mm, 가장 큰 플래티넘과 클래식은 520 x 520mm이다. 크기와 별개로 건물 칩의 재질이 플라스틱으로 바뀌고 게임 내 지폐가 새로 디자인되거나 증서를 보관하는 데크가 추가되는 등 더 실감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됐다. 물론 친구들과 우정을 파괴하는 데에는 크기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본 게임보다는 뿅망치나 벌칙 용품을 구입하는 데에 더 신경쓸 것을 추천한다.
가장 고급스러운 패키지의 클래식 버전. 3~4만 원 정도면 최대 세 명의 친구들과의 우정에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다!
 
19세 이하 학생들의 벌칙은 귀여운 뿅망치를, 성인들에게는 맛있는 소주 벌칙을 추천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름은 바뀌지 않아도 플랫폼은 다양해져

‘푸른 지구’라는 뜻의 ‘블루마블’이 제대로 된 발음이지만, 블루마블의 일본식 발음인 ‘부루 마부루’에서 따온 이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부루마불’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설 중 하나이다. 물론 이 설이 사실이라면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이 꺼림칙하지만, 30년이 넘게 이어져 온 이름이라 쉽게 바뀌진 않을 듯하다. 최근 온라인 게임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모두의 마블’은 제대로 된 명칭을 사용했지만 아무래도 촌스러운 이름이 가진 향수를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부루마불 시리즈는 스마트폰 게임, PC 게임으로 많은 버전이 등장했지만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것은 온라인 게임 ‘모두의 마블’이다. 부루마불의 기본 룰에 충실하고 같은 색의 도시를 소유하면 발동하는 ‘독점’과 상대방의 도시를 구매하는 ‘인수’ 등 다양한 변수를 도입했다. 기본 건물 외에도 도시 특유의 랜드마크를 지을 수 있으며 올림픽 및 박람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게임카드를 사용해 상대방을 파산시킬 수 있다. 약 10~20분이면 끝나는 짧은 플레이타임으로도 충분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보드게임방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요즘이다. 친구들끼리 모여도 막상 놀거리가 마땅치 않다면 인근 보드게임방을 찾는 것도 좋겠다. 생각보다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게임들이 즐비하게 마련돼 있어 게임 초반에는 순발력을 요구하는 동물적 감각을, 중후반에는 지식과 센스를 겸비한 두뇌싸움이 요구되는 브레인 서바이벌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생각난 김에 기자도 연말에는 친구들과 보드게임방을 찾아 밤을 새워 우정을 다져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