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 90년대의 가상현실과 실제 다가온 현실 론머맨

2014-03-21     PC사랑
90년대의 가상현실과 실제 다가온 현실

론머맨

미래를 진지하게 논할 때엔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의 시점에서 언급하게 된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환상적인 나라를 뜻하고, 그와 반대되는 ‘디스토피아’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미래세계를 뜻한다. ‘론머맨’은 가상현실을 소재로 디스토피아적인 SF 세계관을 다룬 영화다.
김희철 기자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1994년. MBC에서 납량특집 드라마 M을 방영했다. “내 영혼이 아파오네”의 가사와 함께 시작하는 M의 오프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스산한 노래와 낙태당하는 아이(M의 영혼)를 묘사하는 3D그래픽. 노래가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주사기와 가위를 비롯한 낙태 도구가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지는 장면에서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고, 마지막엔 “몰라!”의 가사와 함께 분노한 얼굴이 정면으로 튀어나오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만다. 당시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기자는 얼굴이 튀어나오는 그 장면만 나오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벌벌 떨었다. 그렇게 무서운 기분은 처음이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세계 최초의 영화 ‘시오타 역 기차의 도착’을 보고 혼비백산해 뛰어나간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영화’라는 문화를 처음 접해본 그들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기차가 자신 앞으로 달려오는 장면이 재생될 때 그것이 허구라고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을 법하다. 일단 피해야 사니까. 경험의 부재는 그렇게 우스운 장면을 만든다. 당시 처음 접하는 ‘가상현실’ 또한 그런 낯선 공포를 주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그 낯설음에 대해 기술적으로 접근한 첫 영화, 이번에 다룰 론머맨이 그런 영화다.
 
M 오프닝의 마지막은 당시엔 충격이었다.
 
세계 최초의 영화 ‘기차의 도착’
 
 
증강현실 지능개발 침팬지

론머맨은 영화 시작과 함께 VIRTUAL SPACE INDUSTRIES(이하 V.S.I)라는 회사 로고와 어둠 속에 둘러싸인 연구소의 모습이 등장한다. 뒤이어 이어지는 푸른 조명의 어두컴컴한 연구소 내부에는 빈 동물우리가 연달아 이어지다가, 1인칭 시점으로 바뀌면서, 헬멧 쓴 침팬지가 나온다. 바로 앞에서 의견 대립으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을 보며,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표현하듯이 이빨을 부르르 떠는 침팬지. 심리상태가 심히 불안해보인다. 이어 침팬지의 기억으로 추정되는 가상현실 FPS 게임의 장면이 나온다.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적을 잘 쏴 죽인다. 앞서 주어진 정보로 맴도는 불안감은 ‘일 크게 내겠구나’ 라고 관객들을 예측하게 만들고, 결국 이 침팬지 친구는 철사로 자물쇠를 열고 탈출하게 된다. 영화는 침팬지 1인칭 시점으로 변환되며 이제 사람들이 궁금해 할 법한, 침팬지 머리에 쓰여 있는 헬멧의 정보를 알려준다. 침팬지 시점이 전투기 조종석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듯한 화면으로 바뀌면서, 증강현실 헬멧이었다는 걸 알게 한다. 이 만능 헬멧은 성능이 꽤 좋아서, 경비원들을 적으로 인식하고 적외선 감지로 어둠 속에서 위치 파악 후 거리를 잰다. 상황에 대한 판단도 도와준다. 경비원의 허리춤에 달린 권총과, 카드키의 위치를 자동으로 확대시킨다. 이제 침팬지는 망설임 없이 경비원에게 달려들어 어린애 사탕 빼앗듯 권총과 카드키를 쉽게 강탈하고, 얼굴에 총알을 날리는 살인 침팬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때로부터 19년이 지난 현재, 이 침팬지의 살인 행각을 도왔던 증강현실 헬멧은 긍정적인 면에서 실현 가능한 기술이 되어 우리 앞에 선보일 예정이다. 스마트폰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증강현실 앱에서 한술 더 뜬, ‘입는 컴퓨터’로 잘 알려진 구글 안경이 그 좋은 예이다. 구글 안경은 실시간 위치정보 제공, 인터넷 음악감상, 시간 온도 체크, 음성 문자 송수신, 동영상 촬영 등 유용한 기능을 제공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팬지의 살인 행각을 돕는 헬멧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이 구글 안경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증강현실의 힘을 빌린 상대방에게 아무런 동의 없이 강제로 나, 혹은 내 물건에 대한 정보가 알려질 경우엔 썩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침팬지가 경비원의 동의 없이 권총, 카드키를 뺏었던 것처럼 말이다.
 
침팬지의 증강현실 시점
 
구글 안경을 착용한 모습이다.
 
 
동네 바보청년이 가상현실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

침팬지의 주인이자 이야기의 주인공 안젤로 박사는 가상현실과 약물을 이용해 두뇌 향상 기술을 꿈꿨다. 그러나 V.S.I는 안젤로 박사의 순수한 연구에 군사목적을 추가하길 원했고, 침팬지에 폭력성을 추가시켜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두문불출하며 가상현실에서 위안을 얻는 안젤로 박사. 그런 비관적인 박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동네에서 바보 소리를 들으며 천대받는 죠브라는 청년이었다. V.S.I에서 더 이상 연구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안젤로 박사에게 죠브는 좋은 실험대상이 되었다. 죠브는 약물과 병행하여 가상현실로 지식을 빠르게 받아들인다. 그 속도가 빨라서, 박사는 집에 있는 장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V.S.I로 돌아가 죠브를 교육시킨다. 여기서 사용된 기기가 우주자세제어체험장치의 모양을 하고 있는 가상현실 하드웨어와 시각적인 효과를 처리하는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이하 HMD) 두 가지이다
 
HMD를 착용하고 우주자세체험장치에 매달려 돌아간다.
 
 
가상현실 하드웨어는 론머맨에선 손, 발도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뇌파에 그 조작을 의지한다. 현재로 와보면 이 또한 가능한 기술이 되었다. 뇌파를 이용해 조작이 가능한 헤드셋은 이미 구입이 가능하다. 이모티브의 ‘EPOC 뉴로헤드셋’과 그 외에 여러 가지가 나와 있는데, 게임은 손으로 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부수고 팔짱을 끼고 뇌파로만 카운터 스트라이크 등의 FPS 게임을 하는 신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는 보통 영화관에 온 듯한 시청 환경을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최근 ‘오큘러스 리프트’라는 하드웨어가 공개되면서 그 개념을 뒤집고 있다. 오큘러스 리프트와 타 HMD 제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시야각이다. 일반 HMD는 40도 정도의 평평한 시야각을 제공했으나 오큘러스 리프트는 좌우 110도, 상하 90도의 시야각을 동해 인간의 시야를 압축한 듯한 효과를 나타낸다. 또한 사람이 시야 중심에 초점을 맞출 때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음으로 가상의 화면에서 실제 사람의 시야와 같은 느낌을 구현했다. 또한 헤드트레킹을 구현해 고개를 돌리면 바라보는 시야가 변한다. 둠3와 같은 공포 게임에서 고개를 휙 돌리면 몬스터가 옆에서 덮치는 걸 직접 보는 듯한 아찔한 기분의 체험이 가능하다. 이는 지금까지 평평한 스크린을 보는 느낌에서 벗어나, 마치 직접 가상 현실 안에 존재하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든다.
 
 
뇌파를 감지하는 ‘EPOC 뉴로헤드셋’

 
인간의 시야를 재현하는 ‘오큘러스 리프트
 
 
사이버 섹스

론머맨은 ‘사이버 섹스’ 장면으로 유명하다. 죠브는 동네에서 유명한 미망인의 집에서 상의를 벗고 잔디를 깎다가, 몸짱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뜨거운 정사를 치르게 된다. 여기서 죠브는 가상현실 공간으로 들어가 정사를 치르는 방법을 생각해내고, 결국 미망인을 V.S.I 실험실로 초대해 그 유명한 사이버 섹스를 하게 된다. 가상현실 공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가 엉겨붙듯 휘감긴다. 둘이 하나가 되어 한 마리의 잠자리로 변해 행복하게 나는 것도 잠시, 폭력성이 강화된 죠브는 미망인을 거미줄에 가두고 괴물로 변신해 의식을 파괴해버리고 만다. 제 정신으로 돌아온 죠브는 바로 가상현실을 종료하고 미망인을 끌어내린다. 그러나 몸은 살아있지만 시야가 풀린 미망인을 보며 우리는 현실에서도 정신적으로 죽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달콤한 사이버 섹스의 끝엔 죽음이 기다린다.
 
 
사이버 섹스에 관해선 오감의 구현이 가상현실로 모두 이루어져야 한다. 기술적으로 보면 ‘버추얼 코쿤’ 이라는 기기가 제일 가깝다. 헬멧 형태로 되어있는 버추얼 코쿤은 가상 세계를 보고, 소리를 듣고, 촉감을 느낀다. 튜브와 연결된 화학 상자가 맛, 향을 느낄 수 있게 하고, 팬과 송풍기를 사용해 열기와 습도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런 기능을 지원할 지는 모르겠지만, 기술 하나로만 보면 제일 근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으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현재 인터넷에서 악성 댓글에 상처받고 자살까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가상으로 구현한다고 해도 대화 수준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제일 원초적인 만남이기 때문에 론머맨에서 다뤄진 인격 파괴 문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버추얼 코쿤은 인류 생활 패턴에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가상세계의 신

죠브는 잇따른 지능개발로 초능력(염력)을 얻게 되고,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차례차례 복수를 하게 된다. 내친 김에 염력을 이용해 V.S.I 본부로 파죽지세로 쳐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현실세계에서 무적이 된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죠브는 이마저도 만족하지 못하고 가상세계의 신이 되려고 한다.
안젤로 박사는 그런 죠브를 막아보려 하지만, 이미 가상세계에서도 창조자인 안젤로 박사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기에 연구소를 파괴하는 방법을 택했다. 죠브는 인간의 신체를 버려 완전히 사이버화 되었는데, 연구소가 파괴됨에 따라 외부와 접속이 끊겨 탈출 불가능한 곤란한 처지에 처한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네트워크상의 탈출구를 찾아내 전 세계로 퍼져나가, 결국 가상세계의 신이 된다. 현재는 스마트폰의 보급화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각자 성향에 맞는 포털 사이트를 찾아 그 집단 속의 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 뭉친 집단의 성향이 윤리적으로 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경우, 그들의 목소리는 론머맨에서 예견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와 같은 상황을 만든다. 죠브는 신이라 자처해도 단지 개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단체로 똘똘 뭉친 집단의 잘못된 의견은 파급력이 크다. 그것이 사회통념상 보편화될 때 우리는 암울한 미래를 맞게 될 것이다.
 

 
죠브는 육신을 버리고 온라인 세계의 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