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초 삼성전자와 삼보컴퓨터등과 함께 국내 PC업계를 주름잡았던 업체가 있었다.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며 PC업계의 신화를 써내려갔던 그 업체. 바로 현주컴퓨터다. 1989년 11월 설립된 현주컴퓨터는 조립PC를 제조하다가 1992년 9월 주식회사 법인으로 전환된 후 내실 있는 중견 컴퓨터 업체로 꾸준한 성장을 이어나갔다. 조성호 기자
용산 ‘벤처 신화’, 현주컴퓨터
1999년 대학에 고성능 저가PC를 공급하면서 대학시장을 평정한 현주컴퓨터는, 삼성과 LG-IBM이 주도하는 시장에서 업계 3위를 차지하는 ‘벤처신화’로 불렸다. 가격경쟁력에 기반한 파격적인 마케팅이 성공 요인이었다. 저가 조립PC 붐이 일고 있던 대학가에서 ‘판매 2년 후 반값으로 되사주기 보상’ 등 기존에 없었던 차별화된 마케팅을 앞세운 것. 이어 ‘인터넷 무료PC’시장에도 진출해 또 한 번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인터넷무료PC’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독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1999년의 일이었으니까 지금부터 14년 전 일이니 말이다. 당시에는 PC한 대당 가격이 2백만 원 정도였다. 지금처럼 최고급형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그 땐 당연한 줄 알았다. 때문에 컴퓨터 한 대를 사기 위해선 자동차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었다. 무작정 부모님께 조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당시 PC통신과 인터넷이 점차 발달하는 시기였고, 정부 차원에서도 인터넷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선 컴퓨터의 보급이 절실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입찰을 통해 백만 원 대의 ‘국민PC’를 선정하고 우체국을 통해 보급하기도 했다.
획기적인 마케팅으로 성공가도 달려
인터넷무료PC는 지금으로 말하면 스마트폰을 약정으로 구입하는 것과 같은 얘기다. 즉, 2백만 원대의 컴퓨터를 인터넷 서비스 포함, 3년 동안 월4~8만 원 정도의 이용료만 지불하면 PC통신과 인터넷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마케팅이었다. 그리고 이를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곳이 바로 현주컴퓨터였다. 현주컴퓨터는 99년 5월, 천리안과 외환카드, 인텔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공동 PC마케팅’을 선보여 PC시장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PC를 구매할 때 3년간 월 4~7만원의 할부금을 부담하는 조건(외환카드로만 결제 가능)으로 구입한 PC로 인터넷과 PC통신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최대장점이었다.현주컴퓨터는 이 제휴를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높여 시장점유율을 끌어 올릴 생각이었다. PC통신 업체 천리안은 가입자 확보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설 수 있었고, 외환카드는 할부수수료에서 약간의 손해를 감수했지만 3년간 고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인텔의 경우는 국내 CPU 시장에서 90% 이상의 높은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해 광고료 일부를 부담했다. 이 마케팅 전략은 소비자 부담을 크게 낮췄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실제로 접수를 시작한 지 나흘 만에 신청자 수가 1천명을 넘어섰으며 열흘 만에 4천여 대를 판매한 것이다. 할부납입금과 할부기간(36개월)을 곱한 총액은 151만 9,200원에서 262만 8,000원. 3년간 할부수수료와 월 1만 원 이상의 천리안 이용요금이 포함된 점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혜택이었던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현주컴퓨터는 2001년 5월에 코스닥에 등록하며 벤처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듯 했다. 일본과 캐나다에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2002년에는 영국 런던에 현지 지사를 설립해 유럽 진출을 본격화했다. 매출도 덩달아 가파르게 상승했다. 98년 305억 원이었던 매출은 99년 1천억 원을 돌파했고 2000년에는 3천 325억 원까지 오르며 최고조에 달했다.
PC수요 급감으로 치명타
성공 신화가 너무 빨랐던 걸까. 어렵게 코스닥에 입성했지만 방만한 경영에 PC수요까지 줄어들자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매출은 감소하기 시작했고 영업 손실도 94억 원까지 치솟았다. 3천억 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고도 영업 적자에 허덕인 것. 설상가상으로 40억 원 이상 투자해 개발한 노트북은 이미 글로벌 기업들이 선점한 시장에서 냉담한 반응만 돌아 올 뿐이었다.
40억 원 이상을 들여 개발한 노트북이지만, 시장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사진은 현주컴퓨터 노트북 A550 모델. 당시 가격은 216만원이었다.
현주컴퓨터는 전국 700여개의 대리점을 확보해 전국 유통망을 갖췄지만, 체계적인 정책 없이 사업권을 남발해 같은 대리점끼리 경쟁해야 하는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부추겼다. 또한 컴퓨터 유통체계가 홈쇼핑이나 양판점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등 현주컴퓨터는 점점 내리막길을 걸었다.
방만한 경영도 큰 몫 차지해
당시 현주컴퓨터 김대성 사장은 컴퓨터 판매로 수익이 나지 않자 인터넷 전화 사업과 ‘50원닷컴’ 등 인터넷 사이트 운영에도 손을 댔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특히 회사의 적자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코스닥 공모자금으로 사옥을 새로 짓는가 하면, 이를 담보로 80여억원을 차입해 상가분양사업에도 뛰어들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회사의 상황이 안 좋아지면 항상 꺼내드는 카드가 있다. 바로 임금삭감과 인력감축. 현주컴퓨터도 결국 이 카드를 꺼내들었고, 일방적인 그의 결정은 회사를 살리기보다 더 악화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해고된 직원들을 중심으로 민노총 금속노련 산하 현주지부가 결성되었고, 이미 회사대표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만큼 100명 가까운 직원들이 노조에 가입했다. 급기야 현주컴퓨터는 주력사업인 PC사업을 철수하겠다는 엄포를 놓았지만, 이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현주컴퓨터는 무리한 마케팅과 방만한 경영 등 2005년 4월 24억원을 결제하지 못하고 최종부도 처리되고 말았다.
무분별한 대리점 확장은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을 부추기고 말았다. (위 사진은 내용과 관계없음.)
현주컴퓨터는 무리한 마케팅과 방만한 경영등으로 최종부도 처리되고 말았다. 사진은 현주컴퓨터의 전 홈페이지 화면.
이후 법정관리개시결정을 받은 현주컴퓨터는 새로운 CI(Coporate Identity)와 BI(Brand Identity)를 변경하며 새로운 기업 이미지 구축에 나서며 재기를 다짐했지만, 이미 무너진 회사를 다시 일으키기엔 역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