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두 번 바뀌어도 살아남은 개발자들, 이들이 궁금하다 게임의 정복자들

2014-11-13     PC사랑
<PC사랑>이 창간 18주년을 맞았다. 이에 발맞춰, 성년을 의미하는 숫자‘18’을 콘셉트로, 18년 이상 게임을 개발해온 대한민국 게임 장인들을 만나봤다. 18년 이상 게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발자취를, 18년 전 게임생태계는 어떠했는지, 나아가 18년 뒤 게임계는 또 어떻게 변할 것이지 전망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게임 개발자로서 한 길을 걸어온 게임장인들. 함께 개발에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게임계에서 자취를 감춘 지금도, 이들은 살아남았다. 여전히 저력을 과시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게임 개발자란 직업이 내 천직’이라는 우직한 방향성 하에, 수많은 명작들을 완성시킨 이 시대 게임의 정복자들, 이들을 만나봤다.
윤영진 기자
 
 
공통 질문

1. <PC사랑> 18주년 축사를 부탁드린다.
2. 게임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3. 처음 개발했던 게임은 무엇인가?
4. 18년 전 게임생태계는 어떠했나?
5. 18년 후 게임계를 전망한다면?
6. 현재의 대한민국 게임계를 어떻게 보나?
7. 게임 개발을 꿈꾸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8. 새롭게 도전하고픈 장르 및 향후 계획은?
 
 
‘ 바람의 나라’나 ‘리니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게임계는 어떻게 변했을까. 이 같은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내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넥슨과 엔씨소프트 등이 탄생했고, 온라인 강국 대한민국의 기반이 마련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우뚝 섰던 송재경 대표. 그는 지금 이 시각에도 개발 최일선에서 게임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대한민국 게임계의 새로운 3막 1장을 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 게임계의 판도를 바꾼 ‘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의 아버지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1967년생. 서울대학교와 카이스트에서 컴퓨터를 공부했고, 온라인게임‘쥬라기공원’을 시작으로‘, 바람의 나라’와‘리니지’등을 개발했다. 넥슨 공동 설립자로, 엔씨소프트 부사장 등을 지냈다. 자신이 설립한 엑스엘게임즈에서‘아키에이지’와 모바일 게임‘아키빌’을 런칭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드 마이어의 문명’의 온라인 버전을 개발 중이다.
 
1 1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쉬운 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독자들 IT에 관련된 다양한 소식을 전하며 곁에서 함께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창간 18주년, 성년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 1970년대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네 전파상에서 요즘의 콘솔 게임기와 비슷한 오트론 게임기를 통해 처음으로 게임을 접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우연히 샤프(Sharp)사에서 만든8비트 컴퓨터(MZ-80)를 봤는데, 이 때 친구 컴퓨터로 간단히 덧셈이 되는 프로그램을 짰던 기억도 있네요.

3 1986년도에 대학에 입학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ㆍ모방해가며 본격적인 프로그래머로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 같네요. 폰트 하나하나를 일일이 그리며 워드프로세서 기능을 하는 한글 에디터를 제작하기도 했고, 터보파스칼을 이용해 기초적 레이싱 게임을 제작하거나‘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본뜬 모방형 게임을 만드는 등 다양한 경험을 했지요.

4 당시의 게임 개발 환경이란 PC통신 기반이었기 때문에 현재와 비교하는 건 무의미할 것 같네요. 지난 1994년에 넥슨을 공동 창업할 당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서 게임 개발에만 몰두했습니다. 당시 높은 연봉이나 복리후생을 바랬다면 게임 개발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요.(웃음)

5 처음 게임 개발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온라인 게임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리라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또 많은 부분이 모바일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이지요. 하지만 18년 후에는 또 어떠한 기술이 등장해, 게임시장의 판도를 바꾸게 될 지 지금으로서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웃음).

6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어엿한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모바일 게임 시장이 확대됨으로써, 중장년층까지 거부감 없이 게임을 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요. 이제 모든 연령대, 다른 산업과 더불어 게임업계가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7 무엇을 꿈꾸던지 젊을 때일수록 무엇이든 무조건 도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면 되니까요. 그리고 게임 개발 꿈나무들에게는 다양한 컨텐츠를 가급적 많이 접해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게임은 일종의 종합 예술이기 때문에 책은 물론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등 모두 섭렵해 보는 것이 컨텐츠가 풍부한 게임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8 오랜 개발기간을 거쳐 올해 ‘아키에이지’서비스를 시작했고, 차기작 ‘문명 온라인’ 개발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여러분 앞에 선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바람의 나라
 
온라인 게임‘바람의 나라’의 희귀판 PC패키지 버전(2001년 출시). 밀봉상태로 지금까지 보관중인 기자 스스로가 대견스럽다
 

 
1996년부터 서비스되어 전 세계 온라인게임의 역사를 쓰고 있는‘바람의 나라’는 만화가 김진의 역사 서사극‘바람의 나라’를 원작으로 한 게임으로, 고구려 시대의 생활상과 건축물 등 고대 사회 우리 문화를 게임 속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현재 국내 누적회원 수 1,800만 명, 최고 동시접속자 수 13만 명을 기록하며, 최고의 길을 걸어 온‘바람의 나라’는 서비스 17년이 지난 지금도 평균 동시접속자 약 2만 명을 유지하며 그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8월, 넥슨은‘바람의 나라’홍보영상에 클라라의 사워 장면 영상을 공개,선정성 논란에 휩싸였다. 게임  홍보영상 시장에도‘18세 바람’이 부는 걸까.

 
 
십수년 전, ‘창세기전’ 시리즈의 인기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국내 게임계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두터운 팬층은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들은 매년‘창세기전’의 새로운 소식을 손꼽아 기다렸고, 소프트맥스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상경했다‘. 창세기전’을 통해 게임개발자의 꿈을 키워간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지금, ‘창세기전’은 또 한 번의 새로운 신화를 준비해 나가고 있다. 그 주역, 최연규 이사를 만나봤다.
 
국산 PC패키지 최초,밀리언셀러를 기록했던 창세기전 신화의 주역
 
최연규 소프트맥스 이사
 
1973년생. 지난 1994년, 당시 손노리와 양대산맥을 구축했던 소프트맥스에 입사해 굵직굵직한 PC패키지 게임들을 주도적으로 개발해왔다‘. 리크니스’‘, 스카이&리카’‘, 에임포인트’등을 기획했으며‘, 창세기전’시리즈와‘마그나카르타’등을 통해‘소프트맥스 신화’를 창조해냈다. 현재 MMORPG 장르로 개발 중인‘창세기전4’의 디렉터로 활약하고 있다.
 
 
1 요즘같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전문지로 18년 동안 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봅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 1980년대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당시는 국내에 막 PC가 보급되던 초기였습니다. 그 당시 부모님께서 학습용으로 구입해주신 PC를 통해, 처음 게임을 접하게 되었죠. 특히, RPG게임을 통해 게임이라는 것이 단순한 시간죽이기용 컨텐츠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무섭게 파고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웃음).

3 1992년, 대학 1학년 때부터 PC통신 등을 통해 아마추어 활동을 시작을 했어요. 그러다가, 마음에 맞는 동료들을 만나서 본격적으로 게임 개발에 착수한 것이 1993년 무렵입니다. 처음에 발표한 게임은‘ 리크니스’라는 액션게임이었고 이듬해‘창세기전’을 개발했습니다.
 
4 어찌 보면 당시는 최근 모바일게임의 성향과 비슷했습니다. 간단한 퍼즐게임과 슈팅게임 등이 강세였죠. 개발기간도 3~6개월 사이였고 개발인력도 5~6명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개발환경은 상당히 열악했죠. 대부분 무보수로 일하는 경우도 많았고 지하실이나 창고같은 곳에 모여서 개발했기 때문에 추위나 더위로 인한 고생이 심했습니다. 식사는 컵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였는데, 어느 날 한솥도시락이나와 밥을 먹게 됐다며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추어생활을 끝내고 회사에 들어와 받은 첫 월급으로 당시 콘솔 게임기였던 세가새턴을 1대 구입하니 남은 돈이 없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5 온라인게임이 뜨면서 PC패키지 형태의 게임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모바일 게임을 보면 오히려 과거 PC패키지 게임과 비슷한 형태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비슷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유행이나 흐름이라는 것도 돌고 도는 것 같네요.
 
6 18년 전에는 게임계가 업계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습니다. 그때를 기준으로, 18년 후 프로야구단을 거느린 게임업체가 생겨날 줄은 꿈에도 몰랐죠. 물론 최근 게임업계를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치고는 있습니다만 18년 전 상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아졌다고 봅니다.

7 늘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진짜 플레이하고 싶은 게임을 만들어라’간혹 보면 자기가 만드는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플레이도 안 하는 개발자들이 이외로 많더라고요. 자기 자신도 좋아하지 않는 게임을 남이 재미있게 즐겨주기를 기대하기는 너무 큰 기대 아닐까요?

8 당연하지만, 모바일 플랫폼 게임도 만들어보고 싶고, 약간은 헤비한 전략시뮬레이션 장르도 제작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선은‘창세기전4’개발에 전력 질주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 창세기전’과 함께 PC패키지 시장의 새로운 활력소를 제공했‘던마그나카르타’. 소프트맥스의 전매특허였던‘푸짐한 구성품’이 돋보인다.
 
 
 
창세기전에 대한 코멘터리

 
 
Q. 창세기전은 짜임새 있는 스토리 중심의 롤플레잉 장르로 큰 사랑을 받았다. 기획방향, 어떻게 구상했나.

A. 개인적으로 RPG와 전략 시뮬레이션을 둘 다 좋아해, 이 두 장르를 섞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실제로‘슈퍼로봇대전’이나 코에이‘삼국지’같이 스토리성이 강한 전략게임도 앞서 존재하고 있었고요‘. 창세기전’은 이러한 게임들에 비해 스토리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게이머들은 특히 스토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제작중에도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습니다.

Q‘. 창세기전’시리즈가 국내 게임계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상당했다. 불법복제가 주를 이루던 상황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창세기전’의 승전보는 경이적이다‘. 창세기전’이 대한민국 게임계에 미친 파급효과, 어떻게 보나?

A. 당시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솔직히 실감을 못했는데, 지금 되돌아생각하면‘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운도 좋았지만, 버그 등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국산게임이라 너그럽게 봐주신면이 큰 것 같습니다. 시리즈 누계 밀리언셀러 달성은 국산 PC패키지게임으로서는 유일한 기록으로 알고 있어요. 게이머 여러분들로부터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 600년을 기다려온 통쾌한 복수극!’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카피다. 김태곤 상무,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슬픈 역사를 게임에 담아내고, 조선의 반격이라는 허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거상 온라인’‘, 군주 온라인’등 한국적 색채의 게임들을 우리의 역사적 기틀과 정서 위에 완성시켜 나간 것은, 유행이 아닌 묵묵히 자신만의 스타일로 게임을 개발해온 그만의 장인정신이자, 게임철학이 만들어낸 쾌거였다.
 
 
우리의 정서를 게임에 녹여낸 진정한 21세기 디지털 사관(史官)
 
김태곤 엔도어즈 상무
 
1 하루가 다르게 바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것도 변화의 속도가 가장 빠른 IT분야에서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을 독자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PC사랑의 저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쪼록 20주년, 30주년 축하인사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제가 처음 컴퓨터를 접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당시로는 특이하게 컴퓨터 수업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8비트 MSX기기를 배우면서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게임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92년, 제가 대학교 2학년이던 해에 게임을 즐기기만 하지 말고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친구들과 힘을 합쳐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3 1992년도에 친구들과 처음으로 개발하게 된 게임은‘나이트마스터’라는 RPG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추어 4명이 모두 준비하기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결국 군 입대로 인해, 미완성인 상태로 개발이 중단됐습니다. 이후 이러한 시행착오의 경험을 살려 전략시뮬레이션 장르의‘충무공전’을 개발, 상용화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품의 출시가 1996년도였습니다.

4 초기 시장이 형성되던 시절이고 게임을 즐기는 첫 세대들이 개발의 주축이었던 만큼, 다들 놀랄 만큼 젊었던 것 같습니다. CEO도 젊고 직원들도 다 젊었습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라면 먹으며 밤샘을 하면서도, 즐겁게 개발할 수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일의 강도에 비해서 연봉이나 복리후생이 좋았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웃음). 다들 젊고 부양할 가족도 없었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초기 PC게임의 시장은 불법 복사의 전성시대였습니다. 동네 PC가게에 가면 유행하는 일본, 미국의 게임을 디스크 한 장당 2천원 정도에 복사해주었습니다. 복사해주는 사람도, 받아가는 사람도 이것이 불법이라는 사실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죠.
 
5 그 동안 게임 업계에는 큰 변화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크게 보면 혼자 즐기던 것에서 여럿이 같이 즐기는 것으로, 고정된 장소에서 즐기던 것에서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은 방향으로의 변화였던 것 같습니다. 18년 후라고 해도 이러한 흐름에 변화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여럿이 어울리며 인정받고 싶고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접근성이 좋고 다른 이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게임의 형태적 본질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6 한때 전 세계 온라인 게임 시장의 강자였던 한국 게임은 최근 위기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온라인 게임은 이제성장을 멈췄고 모바일 분야에서는 딱히 우리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아직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국 개발자들의 끈기와 열정은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위기 상황을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7 즐기는 것과 개발하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게임을 즐기는 데는 사전 지식이 필요 없지만 만드는 데는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개발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성공한 분들을 보면 이런 지식이 풍부하고 융합할 수 있는 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8 제가 실질적으로 처음 개발을 시작하게 된 장르는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였습니다. MMORPG장르로 전향하면서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는 더 이상 개발하지 않게 되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바일의 시대가 되면서 다시 한 번 개발해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습니다. 물론 PC를 기반으로 했을 때와는 많이 다른 형태의 게임이 되겠지만, 예전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전략 시뮬레이션 스타일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역사 게임에 대한 코멘터리

Q‘. 역사’라는 초점에 맞춰 게임을 개발한다는 것은 해외 수출이나, 고증 문제에 있어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역사 관련 게임에 주목하는 이유는?

A. 당시 시장의 주류였던 게임 세계관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던 것같습니다. 중세적 판타지가 대세를 이루던 시절, 우리만의 차별화된 세계관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역사였습니다. 다만 이렇게 우리의 색을 유지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우리의 색을 최신의 트렌드에 어떻게 입힐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치열하게 해왔습니다. 전략 시뮬레이션이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여지던시절이 지나고 MMORPG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을 때 우리도 그런 흐름에 발맞춰 한국형 RPG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가‘거상 온라인’과‘군주 온라인’같은 게임들이었습니다.

고증은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철저하게 해야 할 경우엔 철저하게 하고 다소 판타지스러운 분위기로 가겠다고 결정했다면 고증에 너무 얽매이지는 않는 융통성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우리 스스로 웬만큼 고증에서 식견을 갖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해외 수출시, 번역을 하면 원래 갖고 있는 글의 맛이 살아나지 않는 문제 등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