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왕자 팔자가 이따위야 페르시아의 왕자
2014-11-22 PC사랑
‘ 왕자’하면 으레 아라비아의 코가 큰 두건 사나이가 떠오른다. 석유재벌의 2세나 3세쯤 되는 왕자들은 말 그대로 돈을 물 쓰듯 쓰며 호화의 극치를 달리곤 한다. 기원전 5세기 경의 페르시아도 중앙아시아를 기반으로 넓은 지역을 다스리던 고대의 제국이었다. 그런데 게임 속 페르시아의 왕자는 무슨 운명을 타고났는지 가시밭길을 뛰어넘고 수많은 적들과 싸우며 수많은 고난을 겪게 된다. 게다가 시간마저 그의 편이 아니다.
정환용 기자
기자가 처음‘페르시아의 왕자’를 접한 것은 1991년, 주황색의 단색 모니터를 통해서였다. 게임은 1989년에 출시됐지만, 첫 플랫폼이었던 애플 2의 성능이 시대에 많이 뒤떨어져 게임의 그래픽이나 사운드 수준이 좋지 못했다. 이후 페르시아의 왕자는 1990년 IBM DOS 버전으로 다시 출시되며 본격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페르시아의 왕자는 흑백이었던 초기 버전, 그리고 컬러 그래픽이 막 날개를 펴던 시기의 컬러 버전이다. 당시 비슷한 그래픽의 게임들이 많았는데 유독 난이도도 높고 1시간의 시간 제한도 있었던 이 게임이 큰 인기를 끈 것은 게임에 적용된‘로토스코핑’덕분이다. 로토스코핑은 사람의 움직임을 6mm 카메라로 촬영하고 프레임 별로 동작을 모두 입력시켜 만드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온라인 게임‘라그나로크’등에 적용된 속칭‘도트 노가다’와 비슷한 수준의 반복 작업으로, 덕분에 게임 속 캐릭터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게임을 즐기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게임 내용은 뻔한 서양 신파극이다. 못생긴 악당 자파는 공주의 청혼 거절에 분노해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면 공주가 죽는 저주를 건다. 주인공은 60분 안에 감옥, 성내, 용암지대 등을 거치며 악당 무리를 무찌르고 두목 자파를 쓰러뜨리면 된다. 이 시간은 2편에서 120분으로 늘어나 왕자를 더욱 피곤하게 하지만, 납치 오타쿠 공주만을 바라보는 닌텐도의 마리오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인 듯하다.
1990년작 페르시아의 왕자. 최대한 확대해 봐도 콧날만 보일 뿐 온몸이 계단으로 가득하다.
2003년부터 고퀄리티 게임으로 재탄생한 페르시아의 왕자 시리즈. 왕자가 실은 이렇게 잘 생겼다.
명작은 시리즈를 타고
고전 게임 매니아를 비롯해 과거 페르시아의 왕자를 즐겼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1편과 2편, 그리고 클래식이다. 최초의 타이틀은 1989년 10월 애플 2로 발매됐지만 하드웨어의 사양이 매우 떨어져 그래픽과 사운드가 매우 저질이었다. 1990년 IBM PC용 DOS 버전으로 재탄생한 작품이 비로소 게임의 퀄리티를 끌어올리며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지금으로 비교하면 셀러론에서 아이비브릿지로 옮기며 게임퀄리티가 성형한 박명수가 된 것이다.(박명수씨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잘 어울리는 비유 아닙니까?) 국내엔 동서게임채널이 정식 발매했고, 과거 게임잡지‘게임피아’에서 1, 2편을 번들로 제공하기도 했다.
게임이 흥행하는 요건은 매우 다양한 조건이 혼재해 있다. 그래픽이 뛰어나거나, 게임 시나리오와 배경이 탄탄하거나,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거나, 여자 캐릭터가 섹시하거나 등등.(1순위는 물론 맨 마지막 항목이다) 여기서 페르시아의 왕자(1편)는 1990년 당시로선 뛰어난 캐릭터 모션과 함께 생각보다 높은 난이도로 꾸준히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자 역시 처음 386 PC를 선물 받은 뒤 이 게임으로 숱한 밤을 지새웠다.
우측 1시 방향의 붉은 네모가 페르시아의 왕자의 시작이다.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문이 있는데, 그깟 칼 한 자루 줍자고 반대쪽 끝까지 다녀와야 한다. 기자의 기억에 처음 게임을 시작한 뒤 약 40분을 레벨 1에서 헤맨 것 같다.
레벨 1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장면이다. 잔인한 트랩에 꼬치가 되거나 높은 곳에서 추락하거나, 하여튼 왕자에게 새 생명을 기백 번은 준 것 같다. 정말 페르시아의 감옥은 저따위로 설계해 놓는 걸까?
9레벨쯤 진행하면 차라리 감금 퍼즐 액션이 더 어울리게 된다. 철창을 여는 버튼을 위해 이리저리 헤메는 건 기본, 맵 곳곳에 의자도 없이 주인공을 서서 기다리던 악당들과도 놀아줘야 한다. 이쯤 되면 한 번 해보자는 거다.
컴퓨터를 다룬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당시의 기자는 시간제한 때문에 9단계를 넘어 보지 못했다. 최근에서야 무료로 풀린 DOS 버전과 각종 공략을 참고하면서 겨우 클리어할 수 있었다. 1990년의 게임이라 엔딩 역시‘이렇게 악당을 해치운 주인공은 공주를 구출해 페르시아의 왕자가 됐다’는 몇 줄 텍스트로 허무하게 끝난다.(잠깐,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 게 아니라 왕자 되려고 구하는 거였나? 그럼 왕자 아니잖아!)
우여곡절을 거쳐 2003년부터 플레이스테이션을 비롯한 콘솔, PC 게임으로 발매된 시리즈‘시간의 모래’‘, 전사의 길’‘, 두 개의 왕좌’가 각 1년의 텀을 두고 발매됐다. 이외에도‘묵시록’‘, 망각의 모래’등이 페르시아의 왕자 타이틀을 걸고 나왔지만, 메인 스토리와 큰 연관이 없는 스핀오프 형태라서 시리즈에 포함되진 않는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인‘시간의 모래’는 게임 뿐 아니라 영화로도 제작돼 상당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제이크 질렌할이 주연을 맡은 영화‘페르시아의 왕자 : 시간의 모래’는 내용이나 평점은 나쁘지 않았지만 아직 속편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공주 차지했으니 볼 일 끝났다는 건가?
복사방지 시스템, 복돌이는 못말려
페르시아의 왕자에도 불법복제를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이 있었다. 레벨 1을 클리어하면 레벨 2로 넘어가기 전 하나의 단계를 더 거쳐야 하는데, 그 곳에는 위의 사진처럼 알파벳이 떠 있는 물약들이 널려 있다. 아래에 쓰인‘word 3 line 2 page 11’은 정품에만 포함돼 있는 영문 설명서가 있어야만 알 수 있다. 설명서의 11페이지 두 번째 줄 세번째 단어의 첫 번째 알파벳이 레벨 2로 넘어가는 유일한 물약인 것. 가령 해당 위치의 단어가‘Cave’라면, 위 사진에서 보이는 C 물약을 마셔야만 문이 열린다. 기회는 총 두 번이 주어지고, 다른 물약을 두번 마시면 주인공은 사망한다.(불법복제 방지 시스템이지 러시안 룰렛이 아니다.) 게다가 그 설명서는 복사 방지 처리가 돼 있어서 복사기에 넣어도 검은 색으로만 복사됐다.
그러나, 이 시스템도 국내 게이머들에겐 소용이 없었다. 당시 용산의 판매업자들은 몇 개의 정품만을 사들인 뒤 설명서를 무려‘손으로’ 모두 옮겨 쓰는 기염을 토했다. 어차피 한 번만 옮겨 쓰면 해당 필사본을 복사하면 되고, 당시 설명서 복사본이 게임 가격과 비슷하게 팔렸으니 판매자 입장에선 할 만한 시도였을 것이다. 징하다. 그 정성으로 뭘 했어도 성공했을텐데...
솔직히, 부끄럽지만 기자도 이 필사본 카피를 구해 게임을 즐겼었다. 당시 이 게임이 저장된 플로피 디스크는 친구에게 받았고, 고인돌과 더불어 처음으로 즐겨보는 고화질(?) 게임이었다. 게다가 1991년 당시는 열 살이었던 기자가 천 원짜리 한 장도 갖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친구에게 빌린 복사본 매뉴얼을 다시 복사하며 화질이 나빠졌지만, 무턱대로 우연히 맞아떨어질 때까지 수십 번이나 물약 들이켜는 걸 반복하던 것에 신물이 나던 때여서 유혹을 이기기 힘들었다. 지면을 빌어 20세기의 브로드번드 사에 늦은 양해를 구한다. 혹시 페르시아의 왕자 차기작이 나온다면 반드시 정품을 구매하도록 하겠다. 아... 제작사가 바뀌었으니 별무소용인가? 그래도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