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반도체·LCD 산업, 대만을 배워라'

2008-07-02     PC사랑
LG경제연구원 '반도체·LCD 산업, 대만을 배워라'

비슷한 산업으로 인식되어 왔던 반도체와 LCD 산업의 상황이 최근 너무 다르다. 반도체 산업은 오랜 호황을 지나서 공급 과잉으로 수익성이 하락하고 있는 반면, LCD 산업은 최악의 한 해를 보낸 후 상황이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두 산업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두 산업의 게임 룰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본다.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각종 디지털 기기들은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반도체와 LCD를 탑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PC나 노트북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반도체가 필수적이고, 모니터는 LCD로 만든다. 반도체가 사용되는 휴대전화도 화면이 LCD로 구성된 것이 대부분이고, LCD창을 달고 있는 디지털 캠코더의 저장장치 역시 반도체이다. LCD TV에는 LCD를 구동하는 반도체인Driver IC가 수십 개 장착되어 있다. 이처럼 반도체와 LCD는 동일한 수요자를 가지고 있다.

또 두 산업은 장치산업으로 막대한 설비 투자가 들어간다는 것이 비슷하다. 반도체는 속도와 용량을, LCD는 크기를 키우기 위한 기술 경쟁을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두 산업은 제조 방식도 흡사하다. LCD 제품은 유리에 수십만 개의 트랜지스터 회로를 만드는 기술이 중요한데, 이것은 반도체 생산 공정중에서 웨이퍼에 사진을 찍어 전자회로를 만드는 것과 똑같은 방법이다. 반도체와 LCD 산업의 경쟁 구도는 어떠한가. 두 산업 모두 소수의 플레이어들이 경쟁하고 있다. 또 일본업체들이 초기에 시장을 주도했지만 결국 한국 업체들에 의해서 역전되었다는 점, 대만의 업체가 따라오고 있다는 점등이 흡사하다.

반도체 울고, LCD 웃고

그러나 최근 두 산업의 상황은 서로 반대다. 잘나가던 반도체 산업은 힘들어 하고, 절망의 한 해를 보낸 LCD 업계는 기지개를 펴고 있다.

미국반도체협회가 발표한 4월의 세계 반도체매출액은 199억 2천만 달러로, 2006년 11월 225억 달러 대비 11% 이상 감소한 수치다. 사실 반도체 수요는 2006년 중반에 약간 떨어지는 듯하다가 2007년부터는 수요가 회복세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2005년부터 주요 반도체 업체간 설비 투자 경쟁으로 인해 수요 증가를 초과하는 공급 과잉 상태가 지속된 것이다. <그림 1>의 반도체 고정거래 가격을 보면 6달러에 가깝던 DRAM 가격이 4개월 만에1/3도 안되는 2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플래시메모리 시장에서도 나타난다. 2005년 수요와 공급이 거의 비슷하던 시장환경이 2007년 들어 30% 이상의 공급 과잉이 지속되고 있다(<그림 1> 참조). 한국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일본의 도시바와 소니, 미국의 인텔, 유럽의 STM 등 주요 반도체 업체들간의 설비 증산 경쟁으로 인하여 공급 능력이 갑자기 커졌기 때문이다.2005년 이후 지속적인 수요 증가 추세에도 불구하고 한 때 10달러까지 올라갔던 가격이 최근에는 2달러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반도체 업계는 지금 거센 경쟁에 놓여있다.

반면 LCD 업계는 2005년과 2006년의 실적부진으로 인해 올해 설비 투자 규모가 산업 전체적으로 축소되어 생산능력(Capa) 증가율이 크게 둔화되었다. 이로 인해서 수요 증가를 충족 시켜줄 공급이 부족하여 가격이 안정화되고 있다. <그림 1>의주요 디스플레이 패널 가격 추이를 보면 32인치와42인치 TV용 패널 가격이 안정화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노트북과 모니터용 패널과 함께 TV용 패널도 가격 안정세가 지속됨에 따라 LCD 업계의수익성이 좋아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 LCD업체들은 보유하고 있는 생산능력 조차 수익성 저하가 우려되면 가동률을 축소하고 있다. 따라서 향후에도 공격적인 설비 증설은 자제할 가능성이 높다. 이른바 업체들이 서로 암묵적인 담합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과거 제살 깎아먹기 식의 설비 증설경쟁을 하던 상황과는 너무도 달라졌다. 아픔을 경험한 후 성숙했을까? 현재 LCD 업계는 게임이론의 반복게임 상황의 Nash 균형에 도달한 상태다(<박스 기사> 참조). 서로 협조하는 전략을 채택하여 참여자 모두 이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반도체 업체와 LCD 업체들의 전략적 차이를 가져온 이유는 무엇인가? 반도체 업체들 사이에서는 암묵적 담합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인가? LCD 산업에서의 평화 공존은 일시적인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선 반도체와 LCD산업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업체들이 만들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를 위주로 설명해 보자.

반도체와 LCD 산업은 게임 룰이 달라

반도체와 LCD 산업은 비슷한 점이 많지만 몇 가지 포인트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경쟁 구도가 다르다. 비슷한 여러 업체들이 과점을 형성하고 있는 LCD와달리, 반도체 산업은 강력한 하나의 업체가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업체별로경쟁을 통해 얻는 이득(Payoff)이 다르다. 기술이나 자본, 생산 역량이 앞서 있는 업체가 공격적으로 경쟁을 하더라도 손해를 덜 보고, 상대방을 이겼을 때는 훨씬 커다란 이익을 얻게 된다. 게임에서 이익(Payoff)이 업체의 역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반복게임이 되어도 앞서 있는 업체가 후발 기업과 협력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싸움을 걸어 후발 기업을 퇴출시키기 위해 공세 전략을 취한다(<박스 기사> 참조). 그래서 반도체 산업에서선두 기업의 공세가 강했던 것이다.

둘째, 기술 환경이 다르다. 두 산업은 모두 기술 경쟁을 통해서 업체들이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도체는 속도와 용량을 키우기 위해서 기술 개발에 사력을 다하고, LCD는 크기를 크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설에 투자를 하는 등 기술 경쟁을 한다. 그러나 반도체와 LCD의 기술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반도체는 경쟁의 끝이 없고, LCD는 경쟁의 끝을 예상할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로 한정시켜 설명하면 용량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침이 없다.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휴대용 저장장치를 보아도 256MB보다는 1GB가 훨씬 좋고, 그보다는 4GB가 훨씬 더 매력적이다. 특히 디지털 기기에 탑재되는 반도체의 경우 용량이 무한정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활용가치가 높아진다. 그래서 반도체의 기술 경쟁은 한계가 없다. 물론 반도체 역시 물리적으로 15나노미터(nm) 이하로 만들 수 없다고 하지만 그 시기는 아직 먼 미래다.

반면 LCD의 경우 크기가 무한정 커질 수는 없다. 공공장소가 아니라면 집에서 100인치 TV를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LCD기술 경쟁의 핵심인 크기 경쟁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반도체 산업은 LCD와 달리 경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기술 경쟁의 끝이 보이면 적자가 나고 힘들더라도 조금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경쟁을 지속할 텐데, 반도체 산업에서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경쟁자들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셋째, 수요 환경이 다르다. 두 산업 모두 비슷한 수요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는 전방 산업, 즉 수요자 층을 점점 넓혀 왔다. 그래서 메모리반도체라고 하더라도 수요자에 따라서 제품이나 플랫폼이 달라졌다. PC에 채택되는 DRAM 시장이 어느 정도 포화되고 공급이 넘치자, 디지털 기기에 들어가는 플래시메모리가 출현했다. 사실 반도체 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DRAM과 플래시메모리는 서로 다른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새로운 수요처가 나타나게 되면 가장 먼저 소비자를 선점하는 기업이 큰 이윤을 가져가게 된다. 삼성전자가 2001년 반도체 불황을 플래시메모리로 극복한 것이 좋은 사례이다.

반도체는 한국식 경영과 잘 맞아

그런데 이와 같은 반도체 산업의 특징이 한국기업의 경영방식과 잘 맞아 떨어졌다. 한국기업은 시장성을 정확하게 따지고 수요를 분석해서 합리적으로 투자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보다는 나중을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투자를 한다. 과거 정부 주도의발전 과정에서 경제성보다는 성장 논리에 따라 덩치 키우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정부가 과도하게 외형을 키워서 문제가 생긴 기업을 구제해 주는 상황에서 무모함은 도전이고 용기로 장려되었다. 그래서 한국기업은 이러한 방식을 많은 산업에 적용했고, 또 성공했다.

대표적인 것이 휴대폰이다. 휴대폰 역시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이 나타날 때마다 기술 경쟁에서앞서 나가서 시장을 선점하는 방식으로 성공했다. 경쟁자보다 성능이나 기술이 앞선 제품으로 시장을 선점하여 초기에 투자 비용을 뽑고 경쟁자가 진입하면 가격을 낮추는 방식으로 경쟁했다. 무조건적인 실행이 한국 기업의 성장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시장이 점점 커지고 소비자의 요구가 제품 성능에 앞서 가는 성장 산업에서나 들어맞는다. 가령 시장이 정체되어 있고 소비자 니즈의 변화가 더딘 소비재의 경우에는 이러한 공식이 들어맞지 않는다. 이러한 산업에서 과도한 투자는 해가 된다. 산업의 발전이 지속되지 않는 곳에서는 이러한 전략이 효과적이지 않다.

이러한 한국식 경영 방식으로 인해서 아픔을 겪은 곳도 많다. 무조건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여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LCD에서 과잉 설비 투자로 업체들이 어려움에 빠졌던 것도 월드컵 등으로 수요가 무한정 늘어날 것이란 낙관론 때문이었다.

한 발자국 물러난 대만 업체

그런데 반도체와 LCD 산업에서 함께 경쟁하고 있는 대만 업체들의 전략은 전혀 달랐다. 심지어 반도체 산업에서는 직접적인 기술 경쟁을 하지 않고 생산 시설만 갖추고 다른 반도체 설계 업체의 제품을 위탁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 을 하고 있다. TSMC에서 시작된 이 겸손한 반도체 사업은 대만의 반도체 역량을 조금씩 끌어올리고 있다.

또 대만 LCD 업체들은 작년 LG필립스LCD와 삼성전자가 7세대 증설 경쟁을 할 때, 뒤에서 지켜보는 전략을 택했다. 이러한 대만 업체들의 전략은 비록 초기 시장을 선점하지는 못하지만, 검증되고 안정화된 장비를 저가에 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굳이 7세대 라인에서 40인치 이상의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것보다 5세대나 6세대 라인에서 40인치대 제품을 소량 생산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5세대 라인에서 42인치 2장을 만들어내도 초기의 작은 수요는 충족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리고 시장이 커지면 7세대에 투자해서대량 생산 체제로 바꾼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올해 대만 업체들은 40인치대 제품들의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자 7세대 투자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높은 위험을 무릎 쓰고 확실하지 않은 곳에 투자하기보다는 안전하면서도 합리적인 전략을 택한 것이다. <그림 2>를 보면 한국 업체는 항상 투자를 선도해오고 있지만, 대만 업체들은 한 발 물러나서 지켜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올해는 대부분의 업체들이 투자를 상당히 줄였는데, 삼성전자는 8세대 투자를 먼저 하는 등 공세전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만 업체를 배워야

사실 이러한 전략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은 과거의 성공체험 때문이다. 과감한 선도 전략이 반도체 산업에서 너무나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96년 반도체 가격 폭락 시 고성능 DRAM(DDR)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뿐인가. 반도체 경기가 최악이었던 2001년에는 PC 중심의 DRAM에서 탈피하여 디지털 기기용 플래시메모리를 개발하여 반도체 가격 폭락을 이겨냈다. 심지어 2001년 히다치가 삼성전자에게 반도체 불황 속에서 리스크 부담을 덜기 위해서 플래시메모리 사업과 관련하여 전략적 제휴를 제시해왔다. 삼성전자는 플래시메모리 역시 시장을 선점하여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여 거절했다. 물론 이후 플래시메모리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앞으로는 환경이 과거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먼저 이야기했던 반도체 산업의 세 가지특징이 달라지고 있다. 우선 한 업체의 시장 주도현상이 사라지고 있다. 2007년 1분기 DRAM 시장을 보면 하이닉스와 ProMOS 군(群)의 점유율이 삼성전자를 넘어섰다(<표 1> 참조). 시장 선도 업체를 견제하기 위해 많은 기업들이 전략적 제휴를 맺어 과점 시장으로 변한 것이다.

또 반도체 산업에서의 기술 변화 역시 속도가 늦어지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반도체 매출과 자본투자 추이를 보면 최근 들어 투자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 그만큼 설비 경쟁을 덜 하고 있다. 실제로 용량 증가 속도가 완화되고 있다. 기술 발전의 한계가 당장 눈앞에 다가온 것은 아니지만 속도가 둔화된 것은 분명하다(<그림 3> 참조). 그리고 새로운 전방산업의 출현도 쉽지 않다. 2000년 이후 디지털 혁명과 같은 새로운 수요의 폭발은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반도체 산업도 LCD 산업처럼 능력이 비슷한 참여자들이 벌이는 반복게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반도체 산업의 경쟁을 통해 반복게임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경쟁하다가 결국 투자를 조절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LCD 산업에서는 이러한 게임 룰을 작년 출혈경쟁으로 이미 배운 듯 하다. 차 세대 설비 투자의 경우 선도자의 이점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서둘러서 진행하지 않는 분위기다. 7세대 대비 8세대 설비투자 증가액은 30.3%이고 기판 크기 증가는 29.2%로 8세대 투자는 효율성을 잘 따져 봐야한다는 시각이 업계에서 지배적이다. 특히 9세대의 경우에는 설비 투자 증액 대비 기판 크기의 증가가 낮은 것으로 나타나 투자 매력도가 더욱 적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 LCD 업계의 수익성이 좋아지면서 기술 경쟁이 다시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표 2>참조). 충분한 수요가 존재한다면 적극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모함은 안된다. 지금까지 한국기업은 엄청난 투자를 하는데 있어 전략적 판단보다는 신념이나 믿음이 앞서 왔다. 이제 수요가 있을 때 접근하는 합리적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우리가 얕보고 무시하고 있는 동안 어느 새 우리와 대등한 수준에 이른 대만 업체들에게서 전략적 판단을 배워야 할 것이다...이병주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