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에서 만난 '열차사랑'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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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에서 만난 '열차사랑' 사람들
  • PC사랑
  • 승인 2008.10.2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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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국


여느 때처럼 나는 각종 철도 홈페이지를 서핑하고 다니며 사라저가는 차량들의 소식을 찾고 있었다. 마침 철도공사에서 일하시는 기관사님의 블로그를 들어갔다가 1호선을 개통과 함께 처음 레일을 달렸던 초기차량들이 곧 폐차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곧장 폐차중인 곳으로 향했다. 서두른다고 하긴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사진을 찍을 수 없었고, 주변이 위험하기도 해서 첫날은 일단 장소만 확인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마지막 질주를 마친 열차들

지금도 처음 본 순간, 그때의 광경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처참하게 부서진 차량을 보며 나는 우리의 발이 되어주었던 전동차들이 고철덩어리로 전락한다는 것이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다. 예전에 폐열차를 이용해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한참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이때만 해도 폐열차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많았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거의 줄었다. 재활용의 기회마저도 잃어버리고 고철로 사라지는 열차들의 운명이 마치 요즘의 세상사와 닮은 것 같다.
다음날 오후 나는 다시 폐차장을 찾았다. 마침 평일이라 근무 중인 직원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전날 밤 왔던 것과 달리 척척 쌓인 전동차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고, 지붕이나 측면이 완전히 부서진 차량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씩씩하게 선로를 달리던 차량들이 이렇게 맨땅 위에 폐품으로 쌓여 있는 것이 어색했다. 차량 내부에도 폐차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직원들이 손수 선반과 의자를 뜯어내고 있었다. 전동차 안은 ‘어떻게 이리 더러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보기 안타까운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한쪽에서 굴삭기로 차량을 부수고 있었다. 거대한 굴삭기가 전동차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창문들이 깨져나가고 차체 측면을 부숴 천장을 여는 작업이 이어졌다. 그 풍경은 마치 거대한 손이 열차의 뚜껑을 여는 것처럼 보였다.

 

서민들과 함께한 지하철1호선 30년


촬영을 마치고 직원들과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차량은 처음 1량에 1억 원씩 들여 만들었는데 지금은 200만 원밖에 하지 않는다고 한다. 철도차량의 내구연한은 법정기간 25년이다. 따져보니 열차는 9천800만 원의 제몫을 하고 사라지는 셈이다.?

1974년 8월 15일 서울의 지하철 1호선이 개통 되었을 때는 사람들은 ‘땅 밑에 기차가 다닌다!’며 교통기술의 발전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비록 우리의 순수기술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전동차는 시민의 발로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면서 우리나라를 세계 4위의 교통대국으로 이끄는 초석이 되었다. 열차는 사라졌지만 역사는 그들을 소중하게 기록해야할 것이다. 

  
  

     

댓글모음
열차지기 : 초기저항차들이 이렇게 사라져 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NDC를 비롯한 일반 객차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곁에서 사라지겠죠? 요즘 혜성같이 등장한 583系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사진들, 글들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_^
경부고속철 : 정말 처참하군요. 기념이 될 수 있도록 손잡이라도 하나 가져오시지 그러셨어요.
정선선사랑해 : 이젠 철박에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T.T
NDC납시오 : NDC형님도 저기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 같습니다. 아, 초기저항이라! 인천행 2번, 청량리행 3번, 수원행은 5번 정도 타본 것 같습니다. 지나간 시절의 모든 것이 그립네요.

처음이자 마지막, 중앙선 새마을호 탑승기

이승종 닉네임 : 경북선 통일호
재작년 이맘때쯤 모처럼 경주까지 나들이를 가면서 통근열차를 타게 되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내가 탄 열차는 동촌, 반야월 같은 간이역에도 서는 완행열차였다. 시간은 다른 열차보다 조금 더 걸렸지만 완행열차의 여유로움과 간이역만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 좋았다. 간이역은 저마다 색다른 모양의 역사와 풍경으로 여행자의 마음을 위로해 준다. 경북선통일호라는 닉네임처럼 한가로이 지선을 타고 떠나는 기차여행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2006년 9월 24일.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전날 특별한 일정 때문에 서울에 올라왔던 나는 볼일을 마친 다음날 대구로 돌아가는 길은 좀더 색다른 코스로 가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중앙선 새마을호를 타기 위해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처음엔 호기심 반 무모함 반으로 갈까 말까를 망설였지만 11월 1일이면 중앙, 영동, 태백선 새마을호 열차가 모두 없어진다는 소식이 들려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그 열차를 탈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을 굳혔다.
열차는 청량리역을 16시에 출발하는 안동행 1093호 새마을호다. 종착점인 안동에는 19시 56분에 도착한다고 했다. 거기서 20시 14분에 동대구로가는 1691호 무궁화호로 환승하면 동대구역엔 22시 10분에 도착하게 된다. 무려 6시간 10분의 대장정이다. 시계를 보니 출발 15분전. 안동행 새마을호 탑승 안내 방송이 나오고, 나는 들뜬 마음으로 플랫폼을 향해 달렸다.
다른 역은 신형 안내기를 쓰지만 청량리역에서는 아직 구식안내기로 방송을 해 더 정겹게 느껴진다. 참고로 17시에 강릉으로 가는 1111호 열차도 10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안동행 새마을호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고속도로가 발달하면서 열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여행

안동행 새마을호의 내부 풍경은 생각보다 고즈넉했다. 일요일 오후인데도 반 이상 손님이 탄 객실이 없었다. 어떤 차량에는 객실 하나에 승객이 하나나 둘 뿐인 곳도 있었다.
내가 오른 객차는 1999년 대우에서 만든 1177호 2호차다. 차내에 달린 LCD 모니터에서 행선안내가 흘러나왔다. 열차가 사라지면 이 행선안내도 볼 수 없을 것 같아 기념으로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오후 4시가 되자 1093열차가 청량리역을 서서히 출발했다.

 

               


정각에 출발한 열차는 20분을 달려 덕소에서 안동발 량리행 1624호 열차와 교행하고, 수도권 전철 구간을 지나 곧 전원의 풍경 속을 달렸다. 양수리와 팔당댐 남한강의 경치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안겨주었다.
남한강의 풍경을 15분 남짓 즐기고 있으니 벌써 양평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양평역은 중앙선 새마을호가 정차하는 첫 번째 역이다. 아저씨 한 분이 내렸지만 타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반대편 승강장엔 청량리로 가는 무궁화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멀리 열차가 달려올 풍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교행열차가 늦게 오는 바람에 양평역에서만 3분을 정차했다. 마음이 급한 이에게는 조급증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시간이지만 내게는 몇 배의 여유를 안겨준 귀한 3분이었다.
50분을 더 달려 원주역에 도착했다. 스무 명 정도의 손님이 내렸고, 타는 사람도 몇 명 보였다. 열차가 멈추고 또 새로운 뜀박질을 할 때면, 마치 여러 개의 세상을 담아놓은 병풍처럼 아름다운 절경이 이어졌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철교인 금대 또아리굴 근처를 지날 때는 원주-제천구간이 산악지대여서 그런지 곡예를 부리는 듯 질주하는 열차의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저만치에서는 고속도로가 ‘나 잡아보라’ 하는 듯 좌우로 길을 흔들어댔다. 마치 여객선을 따르는 갈매기처럼 길에서 앙증맞은 귀여움을 느꼈던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중간에 열차 교행관계로 5분 지연, 6시 20분경에 제천역에 도착했다. 제천역에서 승무교대로 2분간 정차하고 안동을 향해 다시 출발하는데 아쉽게도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제천 이후는 디카 베터리의 압박과 밀려오는 잠으로 사진을 거의 찍지 못했다. 자다 일나기를 반복하니 어느새 단양, 풍기, 영주를 지나 안동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시간을 보니 19시 56분. 정시도착이었다. 몇 번의 시간 줄다리기를 하면서 열차는 제 사명을 충실히 이뤄낸 것이다. 수고하신 차장님께 인사드리고 종착역 도착안내 자막을 카메라에 담았다.

추억으로 간 중앙선 새마을호

4시간 가까운 중앙선 새마을호 탑승을 끝내고 동대구로 가는 열차로 오르니 저녁 8시 14분이었다. 중간에 의성, 탑리, 화본, 신녕, 북영천, 하양을 경유했지만 역시 중앙선답게 특별한 연착 없이 제시간인 22시 10분에 동대구에 도착했다. 고속철도를 이용하면 1시간 50분이면 끝날 여행이었지만 중앙선 새마을호와 함께한 6시간 10분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또 새로 태어난다. 그럼에도 열차의 마지막을 보는 것은 왠지 감당이 잘 되지 않는다. 마지막 한 명의 승객이 내리고 나면 열차는 다시는 레일 위를 달릴 수 없게 된다. 열차야, 너의 마지막 기억 한 켠에 내가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댓글
플랫홈 : 세상이 변하면서 점점 빠른 것만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죠. 그렇다보니 상대적으로 사라지는 것들이 많네요. 좋은 여행하고 오신 것 부럽습니다. 일상에 묶여 열차여행을 통 못하고 있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려요.
칙칙폭폭 : 마지막이라는 것은 언제나 항상 묘한 슬픔과 여운을 남기는군요.
구로행막차 : 좋은 사진,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치 제가 직접 열차에 올라 여행한 것 같네요.
 

              
  
 
  

  

철암 광부아저씨 이야기

임병국 닉네임 : 열차지기

열차사랑을 만든 건 순전히 기차가 좋아서였다. 간이역은 우리와 부모님들의 삶이 담긴 소중한 공간이다. 기차가 대중교통의 전부였던 시절부터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었던 간이역. 애절하리만큼 소중한 기억이 담긴 간이역이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잊혀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들의 글과 사진이 간이역을 온전히 지켜내지는 못하겠지만, 그 기억만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게 하길 바란다.


내가 철암이라는 동네를 알게 된 것이 햇수로 벌써 4년 전 일이다. 사소한 우연으로 시작된 철암과의 인연은 오랫동안 내 마음 한 켠을 훈훈한 감동으로 채우고 있다.

고장 난 카메라가 이끈 인연

내가 광부 아저씨를 만나게 된 것은 내 의지에 의해서라기보다 순전히 아저씨에 의한 것이었다. 철암 풍경을 사진에 담기 위해 근처 산에 올랐다 내려오던 길이었다. 그때 아저씨는 골목길 한쪽에 혼자 서 계셨다. 낯선 젊은이의 출현에 아까부터 유심히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한 눈치를 보던 나는 가벼운 목례로 아저씨를 지나가려했다. 그때 아저씨가 내게 한마디 건넸다.
“어디서 왔는겨? 카메라 기자인겨?”
아저씨는 경상도 말고 아니고 강원도 말도 아닌, 어중간한 강원도 사투리로 내가 어디서 왔는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처음에는 조금 놀랐지만 따지는 듯한 말투라기보다 뭔가 궁금해 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대답을 했다.
“아 예, 기자는 아니고요. 철암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싶어서요.”
“그럼 카메라에 대해 잘 아시겠네. 나 좀 도와주이소.”
“카메라는 잘 모르는데….”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저씨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어디론가 총총걸음으로 가고 계셨고, 나는 자리를 지키기도, 그냥 도망가기도 애매한 시추에이션에 빠지고 말았다. 일단 아저씨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골목길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며 한참을 따라가니 녹색으로 된 대문 앞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으니 부담 갖지 말고 들어오라 하시는데 솔직히 그 말이 더 무서웠다. 그때는 ‘혹시 이러다 날 덮치는 건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었다.
“혼자 사는 집이라 지저분한데, 그래도 들어오이소.”
아저씨는 혼자 살고 있었다. 밥솥은 비어 있고, TV, 비디오, 꿀, 동충하초병, 커피믹스 같은
자잘한 물건들이 방바닥 한 쪽에 널려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는데 아저씨가 밥솥 뒤로 소주병을 감췄다. 그런 아저씨를 보는데 왠지 내가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주 한 병 치운다고 별로 달라질 것도 없는 방이었지만 그거라도 치우려는 아저씨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 한쪽에 가지런히 정렬된 담배꽁초가 눈에 띄었다. 아저씨는 담배를 하루에 2갑씩이나 피운다고 했다.
“이 카메라가 고장이 났는지 언제부터인가 영 사진이 찍히지가 않아. 우리 아들이 왔다가야 이걸 고쳐줄 텐데, 야가 바쁜지 요새 통 안 오네.”
“어디 멀리 계신가 봐요?”
“서울에 있는데, 요즘 일이 많이 바쁜가벼.”
“이리 줘 보시죠. 제가 한 번 볼게요.”

소주 한 병, 담배 두 갑, 그리고 기침

아저씨는 1분에 두어 번씩 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신경 쓰는 것을 알았는지 입을 막고 기침을 하면서도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미안하요. 내가 젊어서 탄가루를 많이 마셔서 이렇게 산다오.”
“괜찮습니다. 카메라는 멀쩡한 것 같은데, 일단 좀더 살펴볼게요.”
카메라는 캐논 구형 자동 필름카메라였다. 무겁고 단단한 것이 그래도 옛날에는 꽤 비싼 녀석이었을 것이다.
웬만하면 내 선에서 고쳐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카메라를 만지는 동안 아저씨는 내내 당신의 아들 자랑을 했다. 웃으며 아저씨의 말에 장단을 맞추었지만 ‘자주 와서 카메라도 고쳐드리고 집안도 돌보는 게 효도일 텐데’ 하는 생각에 속으로는 얼굴도 모르는 아저씨의 아들이 밉게 느껴졌다.
“여기 장성탄전에서 일하셨어요?”
“그렇제. 여기서 20년을 넘게 일했소.”
“원래 고향이 여기세요?”
“고향은 저어기 강원도 딴 덴데, 탄질 하다보이 그냥 여기서 살게 된 거요. 여기엔 나말고도 그런 사람이 많아.”
“퇴직 후에 생활은 어떻게 하세요?”
“매달 생계보조금 20만 원 나오는 걸로 먹고살지. 좀 모자라긴 한데, 그래도 연탄 떼고 하려면 그 돈이라도 귀하지.”
한 달에 20만 원이라니. 내 자취생활을 되짚어 봐도 20만 원이라는 돈은 한 달 생활에 너무나 빠듯한 돈이다.
“이놈의 기침만 좀 멈추면 살만할 텐데, 젊어서 마신 탄가루 때문에 기침이 멈추지가 않네.”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아저씨는 쉴 새 없이 기침을 했다. 혹시 아주머니가 계신지 물어보려 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말을 참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카메라가 먹통인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필름이 잘못 꽂혀 있었던 것이다. 자동카메라라도 필름에 이를 맞춰 써야하는데, 그런 걸 잘 모르는 아저씨가 그냥 대충 꼽아놓고 방법을 몰라 애를 먹었던 것이다. 원인이 밝혀지고 나니 고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 고쳤습니다. 하하하!”
“고맙소. 진짜 고쳐진 거요?”
“제가 고친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어 드리지요. 포즈 좀 잡아 보세요.”
“내가 그래도 한때는 사진도 잘 찍고 그랬었는데, 너무 고맙소. 이건 내 성의 표시니 꼭 받아주시오.”
할아버지가 내민 것은 뜻밖에도 담뱃갑 안에 꼬깃꼬깃 접어놓은 만 원권 2장이었다. 한 달 생계보조비 20만 원 받아 사시는 분이 당신 카메라 고쳐줬다고 이렇게 커다란 마음을 쓰다니. 나한테 2만 원을 주면 어떻게 사시려고. 마음 한 켠이 너무 아프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고친 카메라도 아닌데 돈은 절대 받을 수 없다고 거부했지만 아저씨는 받지 않으면 그냥은 못 가게 할 태세로 돈을 자꾸 쥐어주려 했다. 그만큼 아저씨에게는 카메라 고치는 일이 중요한 일이었고, 그것을 대신해 준 나에게 사례하는 것 역시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난감하다. 돈을 안 받자니 아저씨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고 돈을 받자니 내 마음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아저씨와 협상을 하기로 했다.
“그럼 제가 정말로 감사의 뜻으로 1만 원만 받을게요. 그만한 일도 안 하고 받은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 마시오. 내가 얼마나 고마우면 그러겠소.”
“다시 기회가 된다면 들르겠습니다. 아저씨, 안녕히 계셔요.”
“잘 가시오.”
문 밖에까지 나와 손을 흔드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면서 괜히 가슴 한 쪽이 뜨거워졌다. 사진 한 장 찍게 해 달라는 말에 일부러 웃음까지 지으시는 아저씨.

만 원의 감동 그 이후

처음 갔을 때와 다르게 그 사이 철암은 많이 바뀌었다. 귀신같던 중앙도로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되고, 빈민가처럼 늘어서있던 폐가촌도 도시계획으로 많이 정리될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더 살기 좋은 쪽으로 바뀐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들이 철암 아저씨처럼 어렵게 살고 있는 서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얼마나 큰 도움과 혜택이 될까 의구심도 든다. 아저씨는 차가 없다. 그러니 국도가 4차선으로 넓어진다고 해서 아저씨의 교통이 더 편해질 것도 아니다. 도시계획으로 새 집들이 들어선다고 해서 아저씨 집이 갑자기 살기 좋은 집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아니다. 크고 작은 철암 바꾸기 계획들이 이곳에 사는 분들에게 좀더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아저씨와의 만남 이후 나는 자가용으로 네 번이나 철암을 지났지만 한 번도 아저씨를 다시 찾지는 않았다. 아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저씨가 나를 기억할지도 의문이었지만, 혹시라도 더 나빠져 있을지 모를 아저씨의 모습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저씨를 찾지 않는 게 도리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가끔은 아버지 같은 그리움과 걱정으로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다. 혹시 카메라 건전지가 다 돼서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진 않았을까?
사진 속에서 아저씨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계신다. 오래도록 그 웃음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댓글
박종대 : 돈을 주려는 장면에서 눈물이 다 났습니다. ㅜ,ㅜ 정말 많을 걸 깨달았습니다.
제1221열차 : 마치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을 보는 듯하네요. 혼자서 생활하시려면 많이 힘드실 텐데 안타깝습니다. 어떤 사연으로 여기까지 오시게 된 걸까요.
try120ap : 저분들이 있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건데요. 가슴이 아픕니다. ㅜ.ㅜ
막걸리 선생 : 아아, 인생은 얼마나 알 수 없는 일들 투성이란 말인가!
분천사랑 : 아저씨! 당신이 어디에 계시던 꼭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합니다.
한겨울 : 마음을 토닥토닥. 혹시, 나는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 맞나??? 지기님, 감동 많이 받고 갑니다.
시골장항역 : 지기님 그래도 한번 찾아가 보심이. ^^ 아저씨는 지기님을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역전상회, 그 흥망성쇠의 끝은?

정진성 닉네임 : 곱동이

어린시절 집 앞을 지나던 철길이 너무나 맘에 들어 시간만 나면 철길 가에 앉아 지나가는 열차를 보곤 했다. 일상이 지루해질 때면 주말기차에 몸을 싣고 간이역으로 여행을 떠난다. 기차에서 내리면 장날 내다 팔 물건을 보따리 한가득 짊어진 할머니, 업무보다 청소에 더 바쁜 역무원, 한적한 시골풍경이 나를 맞는다. 살아 숨쉬는 삶의 그림 속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소중한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 기쁘다.
간이역을 돌아다니다보면 역 앞의 가게들, 속칭 ‘역전그룹’들과 만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상호 앞에 ‘역전’이라는 글자를 달아놓고 있다는 점이다. 생필품이나 식료품을 파는 가게(상회), 추탕에 명태전과 탁주를 맛볼 수 있는 실내포장, 백반밖에 없지만 고향의 향기로 가득한 식당들, 까페오레, 라떼, 카푸치노 등으로 불리는 춘추전국을 ‘커피’라는 심플한 메뉴 하나로 통일시킨 다방 등이 역전그룹의 주요 멤버들이다.

역전에 가면 만나는 풍경들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지방 소도시 간이역이 인구감소 등의 이유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간이역이 힘없이 주저앉으면서 그 우산 아래 있던 역전그룹 역시 직격탄을 맞은 것처럼 쇠락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다방 같은 곳은 진작에 자취를 감춰버렸고, 식당이나 슈퍼마켓처럼 주거가 가능한 밀착형 가게 몇 개만이 마지막 생계의 끈을 부여잡고 있다.
서론이 길었다. 오늘은 얼마 전에 갔었던 어떤 시골 간이역의 역전식당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진도 없고 별다른 대화도 없었지만 마치 잠자리에서 들었던 라디오처럼, 어린 시절 읽었던 황순원의 소설처럼 내게 여운을 남겼던 일화다.
여느 때처럼 간이역의 이모저모를 둘러보며 길을 가는 중이었다. 길 한쪽 어느 식당에서 할머니 한 분이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낡은 간판, 먼지 쌓인 식기를 보니 이미 폐업한 지 오래 된 곳 같았다. 누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닌데 할머니는 마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듯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간이역 앞 나무 벤치에 앉아 할머니의 독백에 귀를 기울였다.
“몇 달 만에 문 여니까 먼지가 한 가득이구먼. 녹슬어가지고 문도 잘 열리도 안 하네.”
장사를 그만두고 꽤 오랜만에 문을 열었나보다.
“하기사 보성댁이 간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네. 작년 겨울잉께. 좀더 따뜻해지면 그때 가던지. 모할라 바쁘게 추운 냉골에서 가뿠노?”
카메라를 들려다가 그냥 조용히 내렸다.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얼핏 보기에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니가 있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저세상으로 가고 나니까 이 집도 썩어가뿌네. 씨가 빠지게 돈 모아서 샀던 가게아이가. 에구 맞네. 것도 벌씨로 몇십년이 지난기고.”
“주인이 가뿌고 나니까 아무도 뒤처리를 해주는 사람이 마 없네. 그래도 우짤끼고, 옆집에서 제일 오래 지냈던 내가 처리해줘야지. 니 마지막 가는 길도 내가 다 처리해줬응께.”
그렇구나. 몇 마디 말을 듣고 난 후에야 어렴풋이 할머니와 가게 주인의 사연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에고고 우짜노. 장사도 안됐으면서 정리는 억쑤로 가지런하게 잘해놨네.”
“왜 그때는 매일 저녁기차가 오면 사람들이 밥 묵으러 하도 많이 와서 내가 수도 없이 도와줬던 가게 아이가. 고때 오봉이 아직도 요 있네.”
“언제부터 일케 사람이 없어졌노. 마을이 죽어뿌니까 저 역도 죽어뿌고, 결국 니도 죽어뿌릿고, 이젠 내가 죽을라카나?”
가게 안에 있던 먼지 묵은 의자와 식탁을 리어카에 올리면서 할머니의 독백은 계속되었다.
“하따, 데다. 내도 인자 나이를 묵어가지고 옛날 맨치로 히바리가 음따. 그래도 걱정 마래이. 내가 더 걷어줄 텐께.”
“에고야. 그라게 니도 나가든가 안하고 머할라꼬 끝까지 여 있었노. 맞다, 다리가 불편한데 나가서 비빌 데가 있었겠나. 인자는 마 편하게 걸어 다니겠네?”
오래된 테이프를 다시 듣는 것처럼 할머니의 구구절절한 말들이 이어졌다. 마치 내게는 좀더 귀 기울려 잘 들으라는 주문 같기도 했다.
“인자 물건들은 얼추 다 내 논거 같네. 에고고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마 이틀이 걸려버맀네. 인자 이 집은 철거해버려야제. 니도 그게 맘 편할기고.”
"사진하나 못 찍고 가서 을매나 맘이 섭하겠노. 그래도 마, 내가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으니까 너무 섭해 말그라.."

 
 경북선 개포역 앞에 있는 가게다. 몇 년 전만 해도 장사를 했었는데 어느 날 가보니 이렇게 아예문을 닫았다. 텅 빈 아이스크림 냉장고와 담배 간판만이 이곳 이 가게였음을 알게 해준다. 개포역은 무인역은 아니지만 하루 4번밖에 열차가 없고, 옆 공군비행장을 제외하면 손님도 거의 없는 편이라 다음달부터 하루 2회로 운행을 줄일 거라고 한다.전라선 성산역 앞 가게. 부근이 논 중심의 벌판이고 살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 몇년 전부터 열차가 서지 않는 역이 되어 버렸다. 이용객이 끊기면서 덩달아 가게도 흉물로 전략해버렸다.
경부선 심천역 약국. 문을 열어놓을때도 있지만, 손님은 여전히 지지부진한편이다. 그나마 하루 한 번이지만 서울 가는 열차가 서기 때문에 다른 가게들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소독약을 샀는데 햇빛에 케이스가 바래있어 걱정했다. 다행히 내용물은 괜찮았다. 경전선 양보역 앞 가게. 양보역이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다보니 역에 내리면 이 가게만 보이낟. 공중전화의 흔적도 있고, 좌판의 흔적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꽤 고 괜찮았을 가게 같다. 양보역이 무인역으로 격하되면서 역사가 헐리고 동시에 이 가게도 운명을 다했다. 얼마 전에 들으니 건물마저도 이내 헐렸다고 한다.
 

역전그룹 할머니의 슬픈 독백

뭔가 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나는 바보처럼 “뭐하세요?”라는 한 마디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이마의 땀을 훔친 뒤 집기가 가득 쌓인 리어카를 끌고 역전 골목을 빠져나갔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평소에는 역전가게를 만나면 ‘그냥 뭐’ 하며 지나거나 그것을 카메라의 피사체로 여겼었다. 여행자에게는 쓰러져가는 간이역도 한 컷의 풍경이지만 그곳에 삶을 내놓은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삶이요, 생명임을 깨달았던 귀한 순간이었다.
사회가 변하는 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더욱 윤택한 삶을 위해서다. 하지만, 그 변화는 때로 사람을 도태시키기도 한다. 스펜서 존슨의 저서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서처럼 요즘의 경제논리는 이들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쥐들로 묘사하기도 한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분명 우리가 함께 안고 살아야 할 존재다. 정부는 이런 소외계층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최소한 먹고살 걱정만은 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이 나라의 일인데 폐업지원이나 보조금만 주면 해결되는 줄 아니 답답하다.
이런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승차권을 만지작거리며 여러 생각을 해보았지만,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한번씩 더 가게들을 바라다보는 것! 그러면 여행에 필요했던 박카스 한 병 살 일이 생각날 테니까.

댓글
열차지기 : 울적하네요. 그나마 형체라도 남은 역전상회들이 보이는데, 지금은 아예 철거된 곳, 사라진 곳들도 많아 참 아쉽습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문화재도 아닌 것이 보존의 필요성 보다는 안 망하도록 해줬으면 하는데, 방법이 없을까요? 열차사랑이 연간 억대 매출만 올리면 월 얼마씩이라도 지원금 드릴 수 있을 텐데요. 흑...
Sweet : 할머니의 독백이 아련합니다. 요즘은 스토리웨이나 패밀리마트가 역전상회인 척하며 지내고 있다죠.
플랫홈 : 역전상회, 그것들마저 없어지면 나그네들은 어디서 지친 다리와 배고픈 속을 달래야 할지요. 핏줄 같은 친구를 먼저 보낸 할머니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글만으로도 절절하게 다가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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