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0월 PC사랑 창간호가 처음 서점에 모습을 보였다‘. 택배’란 단어가 생소하던 1997년 처음 PC사랑을 본 기자는, 약 15년여가 흐른 지금 그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됐다. 10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이 두어 번 바뀌었을 지금, 지난 18년 동안 흘러왔던 PC와 IT 업계의 크고작은 이벤트와 사건사고들을 돌아 봤다. 네모반듯한 모니터 속의 게임 캐릭터가 어지간한 사람보다 잘생겨진 현재, 온고지신의 정신을 되새겨 보자.
PC사랑 편집부
PC사랑 편집부
1995년 10월
PC사랑 1호가 나온 지 17년이 지났다. 10년이면 바뀐다는 강산도 내후년이면 두 번 바뀐다. 486 컴퓨터로 원고를 썼을 1호부터 통권 217호를 만들고 있는 지금까지, PC 시장도 수차례의 흥망성쇠를 거쳐 모바일 기기에 메인 스트림을 조금씩 내주고 있는 현재에 이르렀다. 그 동안 IT 업계를 들었다 놨던 사건과 사고들도 많았고, 반가운 소식과 껄끄러운 소식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온고지신,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를 파악해 보고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를 쌓아보도록 하자.
1996년 개인이동통신의 시작,
세계 최초 CDMA 상용화 서비스
세계 최초 CDMA 상용화 서비스
SK텔레콤이 1996년 1월 1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CDMA 이동통신 서비스를 개통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분석에 따르면 CDMA 기술은 1996년부터 5년간 125조원의 생산 유발과 142만 명의 고용 유발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으로 나타났다. 가입자 수도 상용화 후 불과 6년 만에 3000만명을 돌파한 바 있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주로 GSM을 선보했던 세계 이동통신 시장의 판도를 한국의 이동통신사가 바꿔놓은 셈이다. CDMA의 이런 활약은 국내 장비와 단말기 산업에도 결정적인 파급력을 미쳤고, 한국이 IT강국으로 불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비록, CDMA를 최초로 개발한 것은 미국이지만, 젤 먼저 상용화해 세계 시장에 선보인 것은 한국인 만큼 한국 이동통신사가 새로운 이동통신 기술 대중화에 시발점이 됐다.
1997년 편지의 세대교체,
최초의 무료 e-메일 서비스‘한메일’오픈
최초의 무료 e-메일 서비스‘한메일’오픈
‘ 한메일’은 포털사이트‘다음’의 옛 이름이다. 한메일은 1997에 처음으로 도입한 무료 e-메일로 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이 대부분이 한메일 계정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이름이 바뀌어 e-메일주소가 @daum.net으로 할당되는 지금까지도 @hanmail.net 주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실제로 기자도 @hanmail.net인 개인 e-메일을 2개 이상 보유하고 있다. 지금은 네이버와 구글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무료 e-메일 서비스가 많지만 당시에는 대부분이 ‘한메일’을 사용했다. 무료이면서 당시 인기를 끌었던다음 카페 등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네이버를 주로 쓰지만 당시엔 다음 카페가 주류였다.
1998년 애플의 부활, 스티브 잡스의‘아이맥’출시
‘ 아이맥’은 애플이 선보인 일체형PC다. 지금의 올인원PC를 생각하면 된다. 1998년 8월 처음 등장한 아이맥은 아직까지도 애플의 데스크탑 중 주력 품목으로 판매되고 있다. 첫 제품인 ‘아이맥 G3’는 뒤가 궁글고 색상이 들어간 반투명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CRT 모니터가 탑재된 형태였다. 현재의 아이맥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보였던 제품은 그 후 출시된 ‘아이맥5’와 ‘인텔 아이맥’이다. 이 두 제품은 화면 패널 뒤에 PC부품을 배치한 단순한 디자인의 일체형 PC였다. 화면의 각도 전환도 위아래 방향으로만 가능한 형태로 현재의 아이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애플이 이후 출시한 디자인은 이런 두 제품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두께를 줄여 더욱 얇아진 제품으로 선보이고 있다.
1999년 스타크래프트 신화,
게임 대회‘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
게임 대회‘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
90년대 학창 시절을 보냈고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스타크래프트’와‘디아블로2’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게임은 90년대와 2000년대 초열풍을 일으켰던 블리자드의 패키지 게임이다. 특히‘, 스타크래프트’는 단순한 취미 생활에 불과했던 게임이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스타크래프트’ 열풍으로 인해 1999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열린 게임대회인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 이 개최돼 e스포츠의 포문을 열었다. 전 세계의 e스포츠가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셈이다.
2000년 논란의 중심, P2P 서비스‘소리바다’시작
‘ 소리바다’는 MP3와 같은 음악을 공유하는 P2P 서비스였다. PC가 대중화되면서 CD플레이어나 카세트로 음악을 듣기보다 PC로 작업하면서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 소리바다’ 에서는 원하는 음악을 검색해 다운받으면 MP3 프로그램인 ‘파도’ 와 연동해 쉽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또 자신이 공유한 MP3파일을 소리바다를 통해 불특정 다수한테 쉽게 공유가 가능했기 때문에 서버 내 음악의 종류도 많았다. 당시의 한국은 급속도로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저작권에 대한 인식 확립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불법이라는 생각 없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소리바다를 이용해 음악을 감상하고 했다. 결국 소리바다는 저작권 침해로 2002년 7월 31일 폐쇄됐고 현재는 완전 유료화로 전환 해 서비스하고 있다.
2001년 나만의 집, 싸이월드‘미니홈피’서비스 오픈
싸이월드는 키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 창업 동아리인 EBIZ클럽 회원들이 만든 회사다. 1999년 창업 당시에는 클럽 서비스 중심이었으나, 2001년 미니홈피 프로젝트를 통해 개인 홈페이지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과거의 개인 홈페이지는 나모웹에디터 등의 프로그램을 활용하거나 HTML로 직접 홈페이지를 코딩해야 되는 형태였다. 이 때문에 전반적인 지식이 없으면 관리가 불가능 했지만,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는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관리가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현재는 페이스북, 블로그 등 다양한 형태의 개인 홈페이지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지만, 이런 서비스의 시발점은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라고 할 수 있다.
2002년 누구보다 빠르게,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1천만 명 돌파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1천만 명 돌파
초고속 인터넷은 ADSL 등을 활용해 1Mbps 이상의 속도를 내는 인터넷 망을 말한다. PC통신 시절과 달리 인터넷을 하면서도 전화를 받을 수 있으면서도 ISDN보다 빠른 속도로 인해 호평을 받으며 1998년 6월 서비스 시작후 4년 만에 가입자 1천만을 돌파했다. ADSL은 1988년 미국의 벨코어가 VOD의 사용화 서비스를 위해 개발한 기술이다. 하지만, VOD 상용화 진척 문제로 크게 부각되지 못했었다가 1995년 인터넷 붐으로 통신속도의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ADSL 기술이 활용됐다. 초기의 ADSL은 다운스트림 8.0 Mbit/초, 업스트립 1.0 Mbit/초의 속도에 불과했지만, 꾸준한 발전을 거치면서 2008년 기준 다운스트림 24.0
Mbit/초, 업스트림 3.3 Mbit/초로 발전했다.
2003년 IT 강국 자존심 붕괴, 1·25 인터넷 대란
최초의 CDMA 상용화, 최초의 e스포츠 대회, 1가정 1PC 등 한국은 IT강국으로 손꼽힐 정도로 IT산업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하지만, 이런 IT강국의 자부심이 한순간에 무너진 사건이 있었다. 바로‘1·25 인터넷 대란’이다.
1·25 인터넷 대란은 한국의 인터넷 망이 마비된 사건으로 2003년 1월 25일에 발생됐다. 마이크로소프트 SQL 서버의 허점을 이용하는 슬래머 웜을 통해 발생됐다.
슬래머 웜에 감염된 PC들이 대량의 데이터를 생성, KT 혜화전화국에 위치한 DNS서버에 인터넷 트래픽을 집중시켰다. 그 결과 KT혜화전화국의 서버는 공격에 의해 마비됐고, 이로 인해 전국적인 인터넷 트래픽이 다른 백본망으로 우회하면서 다른 DNS 서버도 순차적으로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2004년 내 이름을 온라인에? 인터넷 실명제 논란
IT산업이 발전해 누구나 쉽게 인터넷에 글을 올릴 수 있게 되면서 얼굴이 안 보인다는 점을 악용해 무문별한 주장과 선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됐다. 이로 인해 2004년 신설된 조항이‘공직선거법상 인터넷 실명제’다. 이는 위헌 결정을 받은‘정보통신망법상 실명제’보다 3년이나 앞서 시행된 조항으로 인터넷 실명제인‘제한적 본인확인제’에 힘을 불어 넣어주는 제도 중 하나다.
이 제도는 인터넷 선거운도의 폐해를 막기 위해 선거 운동 기간 언론사의 게시판과 대화방 등에서 이용자의 실명을 인증하게 한다‘. 악플러’의 활동과 흑색 선거운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명맥이 계속 유지돼 왔으나, 정보통신망법상 실명제가 위헌 결정을 받으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지만 아직까지도 이 제도는 시행되고 있는 만큼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다.
2005년 두 개의 두뇌, AMD 최초의 듀얼코어‘맨체스터’출시
‘ 맨체스터’는‘애슬론 64 X2’의 코드명으로 AMD가 제조한 최초의 듀얼코어 데스크탑 CPU다. 기존까지의 CPU는 싱글코어로 출시됐지만, 처음으로 2개의 코어를 탑재한 CPU를 선보이면서 데스크탑 시장의 판도를 바꾼 것이다.
이 제품은 유사클록속도의 싱글코어 애슬론64에 비해 디지털 미디어 애플리케이션에서 34%, 생산성에서 평균 22%의 성능이 향상됐다. 현재는 쿼드코어부터 옥타코어까지의 CPU가 출시되고 있지만, 여러개의 코어를 장착하는 멀티코어 첫 시작을 알린 제품인 만큼 더욱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2006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실수, 윈도우 비스타 출시
‘ 윈도우 비스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XP 발매 후 5년 만에 선보인 OS다. 하지만, 국내 홈페이지에서 주로 활용되는 액티브X를 지원하지 않아 인터넷 이용에 많은 불편이 있었다. 또 호환성 문제와 보안 위험성 시비에 휘말리는 등 홍역을 앓았다. 실제로 윈도우 비스타로 인해 마이크로소프트는 막대한 매몰 비용을 지출했으며, 윈도우 사용자 이탈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명하기도 했다.
스티브 발머 CEO가 은퇴전진행한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로“윈도우 비스타를 출시한것”을 꼽았을 정도다. 이로인해 마이크로소프트 최대의 실패작으로 윈도우 비스타가 꼽히고 있다.
2007년 21세기 최고의 혁명, 애플‘아이폰’등장
‘ 아이폰’은 2007년 스티브 잡스가 발표한 애플의 스마트폰이다. 기존까지 출시한 스마트폰들은 불편한 UI(유저인터페이스)로 사용자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출시 초기에만해도 애플의 기행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출시 후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며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다.
아이폰은 멀티터치를 활용한 UI로 기존 스마트폰의 불편함을 최소화했다. 아이폰은 타사 스마트폰들이 주로 사용했던 쿼티(QWERTY) 키보드를 없애스크린을 키웠으며, 모든 동작을 멀티터치로만 할 수 있도록 멀티터치 인터페이스 연구에 주력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아이폰이 탄생하게된 것이다. 애플의 장기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조화를 살려 OS를 최적화에 스마트폰의 최대 단점으로 꼽히던 버그 발생률을 줄인 점도 아이폰의 인기 요인 중 하나다.
2008년 IT 산업의 명과 암, NHN 벤처기업 최초 매출 1조 원 돌파
2008년에는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 네이버를 운영 중인NHN이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벤처기업 중에는 최초다. 네이버는 한메일과 포털 서비스로 성장한 다음을 따라 잡으며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로 성장했고 현재는 온라인 포털업체 재벌이라고 불릴 정도의 입지를 쌓았다. 14년 만에 정상에 올라선 것이다.
네이버는 인지도도 높지만 비판도 많이 받고 있는 포털 사이트이기도 하다. 네이버는 웹 사이트 주인이 검색 로봇을 거부할 수 있도록 정해진 검색 로봇 거부 규약을 무시하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정크 DB에 대한 관리 소홀과 실시간 검색 순위 조작 논란 등의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2009년 휴대폰 시장 대격변, 애플 아이폰 3Gs 국내 출시
아이폰은 전 세계적으로 스마트폰 열풍을 일으켰지만 WIPI문제로 한국에는 출시되지 못했다. 2009년 4월 WIPI 의무탑재 조항이 폐지되면서 출시가능성이 대두됐으나, KT와의 의견차로 협상이 지연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도 GPS의 허가 문제로 아이폰3Gs 출시에 제동을 걸었다. 아이폰3Gs는 이런 역경 끝에 국내 출시된 애플의 스마트폰이다. 비록, KT와의 의견차, 방통위와의 마찰로 출시일이 여러번 미뤄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오긴 나왔다.
아이폰3Gs는 KT사용자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타 이동통신사의 가입자가 KT로 대거 이탈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아이폰3Gs의 인기는 출시 전 예약판매에서는 많은 인원이 몰려 서버가 다운될 정도였고, 출시 후에는 33일 만에 20만 대를 갈아치울 정도로 광풍을 일으켰다.
2010년 ‘아바타’세계 흥행 1위, 3D 미디어 산업 열풍
아바타는 전까지 큰 흥행을 끌지 못했던 3D영화로 개봉 16만에 10억 달러 매출을 달성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아바타는 엔터테인먼트분야에서 최단 기간 10억 달러 매출을 달성한 영화기도 하다. 비록, GTA5에 의해 기록은 깨졌지만 말이다.
아바타 열풍은 한국도 피해갈 수 없었다. 국내개봉 20일 만에 700만 관객을 돌파했고, 관람객 중 상당수가 2배 가까이 비싼 디지털과 아이맥스 3D로 감상해 1000만관객을 달성하기 전부터 한국 박스 오피스 매출 기록 역대 1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한국에서 처음으로 극장 영화 수익 1억 달러를 넘겼다.
아바타는 국내 3D 미디어 산업에도 일조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아바타의 활약을 계기로 2013년까지 2000억 원의 예산을 컴퓨터그래픽 산업에 투입했고, 영화진흥위원회도 아바타로 인해 3D 영화 기술 개발에 투자한 바 있다.
2011년 ‘프로그램’의 아버지, 데니스 리치 사망
2011년은 프로그램의 아버지 데니스리치가 사망한 해이다. 데니스 리치는 ALTRAN, B언어, BCPL, C, Multics, 유닉스 등 개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한 전산학자이자 현대 컴퓨터의 선구자다.
스티븐 잡스와 달리 데니스 리치의 추모 열기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만든 C언어가 없었다면 PC를 기반으로 한 대부분의 것이 출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자바와 파이썬 등의 프로그래밍 언어도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모든 프로그래밍의 뿌리가 되는 C언어의 아버지가 바로 데니스 리치다.
2012년 웹 서비스의 후퇴, 한국 야후 서비스 종료
인터넷 초창기에는 높은 시장 점유율을 보유하였던 야후가 2012년 말 한국 서비스를 종료했다. 이는 네이버의 시장점유율이 점차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야후코리아의 입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네이버와 다음의 시장점유율이 각각 70%대와 10%대인데 비해 야후는 1%도 안되는 낮은 점유율을 보여 왔다. 이처럼 국내 포털 사이트 시장은 네이버의 독주 체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가운데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다 결국 철수 결정을 단행한 것.
다음도 인수설에 계속 휘말리고 있는 만큼 네이버의 독주체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2012년 웹 서비스의 후퇴, 한국 야후 서비스 종료
인터넷 초창기에는 높은 시장 점유율을 보유하였던 야후가 2012년 말 한국 서비스를 종료했다. 이는 네이버의 시장점유율이 점차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야후코리아의 입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네이버와 다음의 시장점유율이 각각 70%대와 10%대인데 비해 야후는 1%도 안되는 낮은 점유율을 보여 왔다. 이처럼 국내 포털 사이트 시장은 네이버의 독주 체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가운데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다 결국 철수 결정을 단행한 것.
다음도 인수설에 계속 휘말리고 있는 만큼 네이버의 독주체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현재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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