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을 낀 연휴 사흘 동안 아내가 모임이 생겨 처가에 내려간다고 했다. 같이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급히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이 있던 터라 다음을 기약하는 형편이었다. 하늘에 뜬 달이 해에게 자리를 비켜준 지 얼마 안 된 이른 아침이 되었다. 아직 잠이 덜 깨서 실눈을 뜨고 눈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애써서 저항하고 있는데 내 인기척을 금새 눈치챈 아내는 짤막하고 높은 어조로 말을 건넨다.
”자기 일어났어?” 어제 쌓인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마음속으로는 아무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조금은 늘어지는 어투로 “응….”하고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잠을 깨운 불침번에 대한 투정 섞인 화답이었다. 잠시 몇 분 시간이 지나고 흐렸던 정신을 가다듬어 몸을 추슬러서 일어났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실타래가 엉키고 설킨 것처럼 멍한 상태였다. 잠이 덜 깬 게슴츠레한 눈으로 사방을 훑어서 봤다. 아내는 벌써 부산한 손놀림으로 여행갈 채비를 하느라고 바쁜 일상을 앞서서 시작하고 있었다. 처가에 내려가서 입을 옷가지며 부모님과 조카에게 건넬 간단한 선물을 챙겨 나갈 준비를 서두르는 장면이 보였다.
길이 막힐 것을 생각하면 짧은 시간이라도 아껴서 집을 나서는 편이 현명하기 때문일 게다. 짐 보따리를 차에 실어주고 떠나는 아내에게 손인사를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내 꿈나라에 침입해 단꿈을 깨운일직사관이 떠난 내무반에는 이제 나만 남겨졌다. 아침 점호도 끝났으니 다시 한숨 늘어지게 잘 요량으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배고픔을 알리는 배꼽시계의 외침에 눈을 뜨고 벽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4시간이나 잔 것 같다. 시장기가 동하니 눈이 번쩍 떠지고 곧바로 움직일 동력원을 찾는다. 아내가 집을 비우는 기간은 사흘, 시간으로 따지면 채 70여 시간을 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동안 아내가 채워주던 식량수급을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녹녹하지 않은 타이밍이다. 먹이를 찾는 일개미가 되어 수납장이며 냉장고를 뒤져보니 내키는 사냥감이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냉동고를 열어보니 딱딱하게 얼어 동면상태에 있는 두툼한 돼지고기 목살이 있어 냉큼 꺼내서 불판 위에 올려놓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채식을 결심한 상태지만 이렇게 마땅한 먹을거리가 없는 위급상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육식동물이 될 수밖에 없다. 고기 위에 살살 소금도 몇 줌 뿌려주고 이리저리 뒤집으면서 나만의 솜씨를 부리지만 평소에 요리 교육훈련에 투입된 적이 별로 없는 어설픈 손놀림은 바로 밑천을 드러낸다. 두께가 두꺼운 목살 덩어리라 부분에 따라 바짝타거나 설익어버린 것이다. 처음 날고기 상태를 생각하고 지나버린 시간에 굽히지 않으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당장 배고픔을 잊어야 해서 아쉬움을 담은 고기로 배를 채웠다.
사진촬영은 노출, 초점, 프레이밍 등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 가운데서도 노출은 다른 여러 가지를 제쳐놓고 기본 가운데 기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환경이 있어서 때에 맞춰 적당한 빛을 이미지센서로 보내는 결정을 내리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기 굽는 일로 설명하자면 가스 불은 햇빛, 불판은 카메라, 돼지고기는 이미지센서에 해당한다. 불판을 지나치게 오래 달구면 돼지고기는 검게 타버린다. 타면 고기가 가지고 있던 육즙이나 맛이 사라지는데, 사진에서는 빛을 심하게 많이 받아들여 밝은 부분 세부묘사가 잘 안 된‘ 노출과다’ 상태를 떠올리면 된다. 거꾸로 고기가 설익으면 육즙은 충분하지만 질기고 먹기가 어렵다. 사진으로 따지면 햇빛에 덜 구워져 어두운 부분을 잘 표현하지 못한‘ 노출부족’을 연상하면 비슷하다.
스테이크를 즐기는 사람에게 거부감이 없이 뻣뻣하지 않고 촉촉한 상태가 중간쯤에서 조금 덜 익힌‘ 미디엄 레어(medium rare)’라고 한다. 촬영할 때 또한 빛을 알맞게 끌어들이면 밝은 하얀 옷도 세부가 꼼꼼하게 표현되고, 머리카락 같은 어두운 부분도 한 올 한 올 보이는 대로 찍힌다. 이런 노출을‘ 적정노출’이라고 부른다. 고기를 구울 때 미디엄 레어를 만들려면 불 조절과 시간을 조화롭게 맞춰야 하듯이, 적정노출 사진 한 장을 얻으려면 빛이 들어오는 양과 시간을 상황에 따라 잘 판가름해야 한다.
·카메라 : 후지필름 FinePix S1 Pro
·렌즈 : 니콘 AF ZOOM Nikkor 35-70mm F2.8D
·노출 모드 : 수동
·조리개 : F11
·셔터속도 : 1/250
·감도 : ISO 320
·화이트 밸런스 : 태양광
존 시스템을 이용해서 노출을 결정하고 촬영한 사진이다. 디지털카메라를 썼으므로 노출을 사진 오른쪽 환한 암벽을 중심으로 맞췄는데, 밝은 부분부터 어두운 부분까지 디테일이 세밀하게 잘 나타난 모습을 볼 수 있다.
좋은 시스템, 존 시스템
우리 눈은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 북극 만년설 위에서 검정 외투를 걸친 사람을 본다 치더라도 어두운 부분부터 밝은 부분까지 무리 없이 잘 살필 수 있다. 하지만, 빛을 받아들이는 도구로 쓰는 필름이나 이미지센서는 사람 눈과 다르게 재현할 수 있는 영역이 상당히 좁다. 이런 문제는 19세기 초반에 사진이 발명된 이래 사진가들에게 늘 골칫거리였다. 사진이 세상에 나온 뒤 100여 년이란 시간이 흐른 193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신 사진가 앤셀애덤스(Ansel Adams)가 이런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는 피사체에 따라 빛을 받아들이는 정도를 체계적으로 예측하고 조절할 수 있는‘ 존 시스템(Zone System)’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고안해낸다.
사진은 물리와 화학을 바탕으로 하는 분야다. 존 시스템은 사진 발명 100여 년 동안 오로지 감에 의존해서 빛 양을 조절하고 인화를 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과학적인 측량법을 제시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피사체는 밝고 어둠의 차이가 만 배 이상 나는 경우도 흔하지만, 필름이나 이미지센서는 차이가 백 배만 넘어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쉽게 말하면 존 시스템은 밝기 차이가 다양한 상황에서 필름이나 이미지센서가 빛을 담을 수 있는 범위를 미리 생각하고 노출을 결정하는 방법이다. 모든 밝기 범위를 필름이나 이미지센서라는 빛을 모으는 그릇에 담을 수 없으니 때에 따라 노출을 밝은 곳이나 어두운 곳에 맞춰 선택하는 방식인 셈이다.
●빛을 담는 그릇에 따른 노출방법
카메라에 끼운 필름 종류에 따라 노출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필름을 많이 쓰던 시절, 그 중심에는 값싼 ‘컬러 네거티브 필름’이 있었다. 이 필름은 우리 눈이 실제로 봤던 색상과 밝기와는 반대로 기록되는 특성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코닥 골드 시리즈’ 같은 필름이 이런 종류에 속한다. 존 시스템에 따르면 컬러 네거티브 필름은 조금 어두운 부분 위주로 노출을 맞춰야 세부묘사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컬러 네거티브 필름은 색을 덜 진하고 부드럽게 표현하는 특징이 있고, 노출이 조금 어긋나도 사진을 망칠 염려가 적은 것이 큰 장점이다.
예전에 환등기에 필름 조각을 넣고 비춰봐서‘ 슬라이드 필름’이라고 부르던‘ 컬러 포지티브 필름’은 주로 사진 전문가들이 많이 즐겨 썼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필름에도 똑같은 색상과 밝기가 나타나는 특징 덕에 이런 이름이 따라왔다. 코닥에서 만드는 ‘코다크롬’이나 ‘엑타크롬’ 같은 필름이 이와 같은 갈래다. 존 시스템을 이용해보면 컬러 포지티브 필름은 가장 밝은 부분보다 약간 덜 밝은 쪽에 노출을 정하면 화려한 색감이 제대로 나타난다. 컬러 포지티브 필름은 색을 왜곡하지 않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특징이 있어 색상에 민감한 출판분야에서 많이 쓰였다.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아 가격이 비싸고, 적정노출을 계산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필름이다.
디지털카메라에 들어있는‘ CCD’나‘ CMOS’ 같은 이미지센서는 앞서 말한 컬러 포지티브 필름처럼 눈으로 봤던 색과 밝기를 똑같이 나타낸다. 디지털카메라 이미지센서는 기술 발전이 눈부셔 빛을 필름보다 더 넓은 범위까지 담을 수 있으며, 감도를 올려서 필름과 견주어도 훨씬 우수한 표현력을 자랑한다.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도 존 시스템을 적용할 수 있는데, 노출은 컬러 포지티브 필름과 비슷하게 가장 밝은 곳보다 조금 덜 밝은 부분이 세부묘사가 제대로 되는 정도로 맞춰야 한다. 너무 어두운 부분 위주로 노출을 결정하면 자칫 밝은 부분 디테일이 사라져버리는 낭패를 볼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노출계가 바라보는 세상은 회색빛
빛이 있어야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빛이 물체에 부딪히면 밝고, 어둠이 나타난다. 만약 지구상에 있는 물체가 가지고 있는 색상을 한 통 속에 넣고 합하면 회색이 평균으로 나올 것이다. 어렸을 적에 미술 시간에 울긋불긋한 물감을 한 팔레트에 섞으면 결국은 회색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과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존 시스템에 따르면 세상에 있는 물체는 평균적으로 받는 빛의 18% 정도를 반사한다. 빛의 양을 재는 노출계는 나타나는 빈도가 높은 피사체 반사율을 기준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세상을 밝은 하얀색이나 어두운 검정대신 18% 반사율을 갖는 회색으로 본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노출계는 적정노출을 찾는데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반사율이 18%에서 크게 벗어나는 하얀 눈이나 검정 콩 같은 것을 촬영할 때라면 사정은 다르다.
밝기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꽃과 나뭇잎이 있는 장면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별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행복한 때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물체가 갖는 평균 반사율 18%에 가까운 상태라 머릿속으로 골치 아픈 계산을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카메라셔터 릴리즈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적당한 빛을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피사체는 자동 모드에서 따로 노출을 크게 조정하지 않아도 적정노출을 얻을 수 있다.
밝은 하얀색을 띠는 눈이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럴 때 노출계는 우리 눈과는 아주 다르게 하얀색을 중간 농도인 회색이라고 알려준다. 사진을 촬영하는 것은 늘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행위의 연속이다. 사진은 결국 사진가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하얀 눈이 잿빛 눈이 될 수도 있다. 눈밭을 본 것과 비슷하게 사진을 담으려면 빛을 더 끌어들여야 한다. 노출계가 알려준 수치보다 조리개나 셔터를 2단계 정도 더 열거나 속도를 느리게 만들어 노출량 을 늘린다. 만약 새하얀 카드처럼 별다른 세부묘사가 필요 없다면 3단계 정도로 바꿔줘야 할 수도 있다.
화면 안에 자동차 타이어 같은 검정색 피사체가 절반을 훨씬 넘은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도 노출계는 영리하지 못해서 회색으로 나오도록 알려준다. 어쩌면 상황에 따라 노출계가 영악하게 멋대로 노출을 알려주면 더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아예 우직하게 18% 반사율을 내는 회색으로 이끌어주는 편이 사진가로서 는 노출을 바로 잡기에 더 쉽다. 맨눈으로 보는 상황과 비슷하게 검정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조리개나 셔터속도를 2단계 기준으로 빠르게 바꿔서 빛을 덜 받아들인다. 세밀한 묘사가 필요한 피사체라면 2단계 내외로 움직이지만, 섬세한 표현이 필요하지 않으면 3단계씩 조절해 아주 까맣게 표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