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완
서울대 경역학과 졸
1989년 삼성물산 인사팀
1999년 프리챌 창업
2008년 유아짱 대표이사
<PC는 내 친구> 저자
이준희
뉴욕주립대 물리학과 졸
1997년 국내 옥션 창업
2000년 이코리아 창업
2001년 디오데오 창업
2003년 알레 창업
2007년 원어데이 대표
영상 SNS로 프리챌 영광을 잇는다
유아짱 전제완 대표
2009년 4월, 본지 연재 코너인 [비하인드스토리]에서 ‘프리챌’이야기를 다루면서 전제완 대표를 만났으니 2년 만의 조우다. 당시 쇼핑몰 ‘유아짱’이 막 발을 디딘 상태인데다, 마무리가 좋지 않았던 프리챌 과거이야기를 들추느라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얼굴에 생기가 넘치는 것이 표정부터 달라져 있었다. 영상 SNS ‘짱라이브’ 덕에 ‘유아짱’까지 다시 입소문을 타며 재기 발판을 다진 덕분이다.
프리챌 떠난 사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년 큰 인기를 끌었던 프리챌은 회원 1000만 명 이상을 보유한 거대한 커뮤니티 사이트였다. 한창 잘 나갈 때 유료화 서비스를 시작해 삐걱거리더니, 지난 3월 공식적으로 파산하며 12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년 전 전제완 대표를 만났을 때 “프리챌은 내 손에서 떠난 자식이지만 애착이 가는 건 사실, 내리막길을 걸으며 실망만 주기 보다는 이름을 바꾸거나,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마 항상 따라다니는 프리챌 창업자 꼬리표 때문이었으리라. 좋지 않은 쪽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의 바람대로 된 셈이다. 그런데 이렇듯 해착을 가진 프리챌을 왜 ‘횡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퇴진했을까. 그 뒤에는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속사정이 숨어있었다.
“아침에 대학교 강의하러 나가는 길, 집 앞에서 갑자기 체포되었다. 검찰 조사를 받으며 내가 ‘가장 납입’(주식의 대금을 정상적으로 납입하지 않고 납입한 것처럼 꾸미는 것) 혐의로 잡혀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장 납입 건은 나중에 무죄로 판명되었다. 무엇보다 회사 이름으로 가지고 있던 부채에 관해서도 충분히 반박할 수 있었지만 해명할 순간도,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2년 형을 선고받았고, 사람들은 당시 프리챌이 유료화 문제로 몸살을 앓았는데, 정황상 전 대표가 부채를 메우려고 유료화했다는 소문에 힘이 실리는 꼴이었다. 억울했다. 단지 그에게 남을 불명예와 250억 원에 이르는 부채 때문만은 아니었다.
“교도소에서 남겨진 가족 생각에, 나와서는 사람들의 시선과 생활고에 나쁜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프리챌이 넘어가는 과정에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고, 기업인으로 명예를 회복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출소 뒤, 그는 6개월에 걸쳐 숨겨진 진실을 하나씩 파헤치며 ‘배신’과 ‘거짓’에 또 한 번 치를 떨었다. 듣는 입장에서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순 없지만 그는 실명을 거침없이 거론하며 자신의 안타까움을 풀어냈다.
“구속되기 전부터 SK텔레콤과 매각협상을 벌이던 중이었다. 당시 회사 자금 구조가 어려워져 내 이름으로 돈을 빌려 썼다. 당시 협상 조건에 내 빚을 갚아주고 프리챌을 인수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감옥에 갔고, 프리챌 전권을 넘겼던 우지형 사장이 갑자기 SK와 거래 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부터 일이 틀어졌다. 우지형 사장은 공군 동기였던 새롬기술에 프리챌 넘기기를 원했다. 새롬기술도 내 부채를 갚겠다는 조건으로 인수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난 프리챌에 100억이 넘는 부채를 떠맡게 된 것이다. 부채를 상환하지 못해 주주에게 손해를 끼친 부분 등이 인정되어 2년 실형을 선고 받은 것이다.”
그의 말처럼 SK가 프리챌을 성공적으로 인수했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을 지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이제와 달라지는 건 없었다. 출소 후 그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친구들은 돈 빌려 달랠까봐 그를 피할 뿐이었다. 그리고 2008년 파산 면책 판정을 받은 뒤, 업계를 떠났다가 7년 만에 프리챌 원년 멤버 윤철중 이사와 명품 쇼호스트로 유명한 유난희 씨와 손잡고 ‘유아짱’(UAJJANG) 쇼핑몰로 복귀했다.
쇼핑몰 얹은 영상 SNS 플랫폼 ‘짱라이브’
명품 쇼핑몰로 복귀했으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유난희’ 브랜드에도 홈쇼핑 고객은 쉽사리 넘어오지 않았고, 쇼핑몰 이름을 들으면 명품 보다 유아용품이 먼저 떠올랐다.
“외국 사람들은 유아짱이라고 하면 한 번에 ‘You(u) Are(a) Best(JJANG)’, 곧 ‘네가 최고다’라는 뜻으로 쉽게 알아들었다. 처음부터 전 세계에 활용할 영상 SNS 플랫폼을 만들 계획으로 지은 이름이다.”
복귀는 작은 쇼핑몰이나 그의 사업은 처음부터 영상 SNS를 고려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중에 쇼핑몰도 얹을 생각이었으니 순서만 바뀐 것이다. 단순하지만 가장 현실적인, 자금 부족이 이유였다. 쇼핑몰은 일단 판매가 바로 돈이니 거꾸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익은 기대 이하였다. 할 수 없이 2005년부터 컨설턴트나 강연 등으로 돈을 벌어 처음 세운 서비스 개발에 몰두했다. 그리고 2010년 1월, 개인이 쉽게 방송을 만들고 올릴 수 있는 서비스 ‘짱라이브’로 20억 원 투자를 이끌었고, 드디어 복귀작을 실질적으로 시작했다.
“짱라이브는 방송 장비가 따로 없어도 쉽게 영상을 올릴 수 있는 안정적인 플랫폼을 갖추었다. 2월에 자금이 없어서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도 3월에 영상 재생이 1000만 건을 넘어섰다. 트래픽 규모는 무려 13GBbps로 국내 동영상 업계에서 10위권에 드는 규모다. 이게 불과 두 달 만에 일어난 일이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까지 출시해 짱라이브 전파에 힘을 실었다. 그는 올 6월쯤 영상 재생 횟수가 3000만을 넘길 것으로 내다봤다. 서비스는 점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아쉽게도 수익은 여전히 없다. 구글 애드센스처럼 짱라이브에 올린 영상을 클릭하는 대로 돈을 버는 ‘애드 오픈마켓’ 덕분에 인지도는 꽤 높였다. 그러나 아무 대가없는 중계자 역할만 하는 터라 남는 것이 없다.
“개인 애드오픈마켓을 반응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최고 600만 원까지 버는 사람도 있다. 이제 사이트가 안정권에 접어들어서 우리도 자체 광고 수익 내기 직전이다. 5월에 N커머스 서비스 수익을 더할 계획이다. N커머스는 단순 결제 서비스가 아니라 상품 영상을 보거나 상대방에게 보여주며 상대를 ‘꼬시는 것’이다. 광고나 쇼핑몰은 보여주면 물건이 팔리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고 난 뒤 여주인공이 입은 옷과 가방 등의 브랜드와 광고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달라고 조르는 여자친구 무시하기 힘들 것이다.”
처음부터 영상이 ‘대세’라고 생각하고 준비한 터라, 사업 계획은 이미 멀리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일반 쇼핑몰은 해외 판매 등에 제약이 많다”며 “짱라이브 플랫폼은 영상이라 답답한 자막을 따로 달아야 하는 일반 웹 사이트보다 해외 고객을 끌어들이기 더 쉽다”고 자신한다. 결국 커뮤니티 성공신화을 만들어낸 그는 소셜과 영상이라는 흐름에 맞는 커뮤니티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유아짱은 명품 쇼핑몰로 시작했지만 대중화를 위해 물품을 다양화 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도전’을 강조했다.
짱라이브 앱을 설치하면 회원끼리 메신저로 영상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인생은 이모작, 어렵지만 도전해라!
사무실 벽 한쪽에 예전 프리챌 시절 인터뷰했던 신문기사가 액자에 걸려있었다. 여러 번 짐을 옮기며 모두 버린 줄 알았는데 책 사이에 우연찮게 끼워져 있었던 것. ‘벤처의 도전정신’을 강조한 내용이었다. 예비 벤처 창업자에게 조언 한마디를 남겨달라는 말에 그는 액자를 한번 쳐다본 뒤 잠시 뜸을 들였다.
“솔직히 창업하면 고생이다. 무조건 하지 않는 것이 좋다(웃음). 게다가 닷컴 열풍이 꺼진 이후 국내에서는 벤처 창업하기 힘들다. 아이디어에 투자하는 사람이 드물고, 최소한의 안정망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전하는 것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좀 더 젊을 때 시작하는 것이 좋다. 첫 판에 성공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학도 재수하는 데 사업 한 번으로 원하는 걸 얻기를 기대하진 말자.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옥석이 가려지는 법이다. 다만 분야를 IT나 이미 성공한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좋지 않다. 남들 시선 의식하지 말고 내가 잘하는 것을 찾아보면 창업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예전에 다는 가락시장에서 경매할 생각을 했었다. 취직이 된는 바람에 포기했지만 …….”
그는 “인생을 이모작”이라고 했다. 평균 수명 100세인 요즘, 40~50대는 또 한번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시기라는 말이다. 그가 강조하는 ‘도전 정신’은 좀 더 힘 있게 들린다.
“난 반 발자국만 앞서나갈 생각이다. 프리챌 때 한발자국 앞서 가려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빠른 성공만큼 끝까지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올 연말까지는 짱라이브를 이길만한 플랫폼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오래 준비해왔고 시작할 것이 많다.”
쇼핑몰 ‘감’이 살아있는 옥션 창업자
원어데이 이준희 대표
신데렐라는 12시가 되기 전까지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원어데이’ 쇼핑몰은 12시부터 마법이 시작된다. 하루에 한 가지만 판매하는 전략으로 온라인 쇼핑족을 유혹하는 방식은 옥션 창업자 이준희 대표의 아이디어다. 1998년 문을 연 옥션은 온라인 경매 방식을 도입해 큰 인기를 끌었다. 후에는 온라인 쇼핑몰 시장 기틀이 되기도. 그는 승승장구하던 옥션을 미국 이베이에 팔고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동영상, 제조업 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댔지만, 능력이 빛을 발한 건 이번에도 쇼핑몰이었다.
인터넷 경매 사이트 신화창조
이준희 대표가 미국 인터넷 우표 경매 사이트를 보고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사업을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옥션을 창업했다. 1997년 마이크로소프트 다니는 후배를 포함해 친한 사람 몇몇과 작은 사무실에서 서버 하나 가지고 시작한 전자 상거래 사이트. 초기 1년 은 방문자수가 제자리걸음이었다.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 그렇기도 했지만 아직은 온라인 결제나 인터넷 쇼핑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탓이다.
이준희 대표는 1만 명에게 10만 원씩 나눠주고 옥션을 이용하게 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이를 계기로 방문자 수는 급격히 늘었고 서버가 마비되는 행복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중고물품 교환 장터로 시작한 옥션은 승승장구하며 국내 최대 오픈마켓 사이트로 자리를 잡았다.
G마켓이나 인터파크 등 다른 온라인 쇼핑몰과 함께 인터넷 쇼핑몰은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 즈음 옥션이 이베이에 매각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벤처 거품이 꺼지고 인터넷 관련주 값이 떨어지기 시작한 2001년 쯤이다. 국내 기업의 해외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은 좋으나, 옥션 가치가 컸던지라 외국기업의 독점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다. 결국은 넘어갔다. 그것도 1700억 원이란 엄청난 액수에.
“물론 이익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 내 돈은 아니다. 당시 옥션 직원이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다 빚으로 산 것이었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최대한 손해를 적게 보는 방향을 찾고 있던 찰나에 이베이 관계자 만난 것이다. 직원 손실분을 해결한다는 조건을 걸고, 옥션 매각 제의를 받은 것이다.”
다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옥션을 떠났다. 옥션 재직 당시 물품 관련 동영상을 올릴 수 있는 전문 사이트 필요성을 느끼고 동영상 포털 사이트 ‘디오데오’를 만들었다. 이 역시 아이디어는 빛났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워낙 새로운 사업에 대한 호기심과 다시 시작하는 것을 좋아한다. 옥션 매각 이후 새로운 사업으로 UCC 사이트 디오데오 뿐 아니라 냉난방기 제조업을 시작했다. 종전 인터넷 유통사업과는 전혀 다른 제조업 분야였다.”
사업은 또 다른 사업 아이디어를 낳는 법. 이준희 대표는 냉난방기 업체를 운영할 때 유통통로가 부족해 곤란을 겪었다. 아무리 좋은 기술로 제품을 만들어도 홍보할 곳이 없었다. 중소기업 판로를 고민하다가 판매까지 이어지는 쇼핑몰을 떠올렸다.
하루에 하나면 충분하다
“쓰임새를 제대로 알면 팔지 못할 제품은 없다. 다만 이 좋은 제품을 어떻게 소개하고 판매할 까를 고민하다 ‘하루에 하나’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매일 바뀌는 물건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때 유통 전문가 박훈종 이사를 만났다.”
함께 자리한 박훈종 이사는 원어데이 제품 유통 과정과 판매 방법에 대해서는 이준희 대표보다 전문가였다. 그는 이준희 대표와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기획”이라는 감이 왔다고 했다. 사업 초기 ‘풍년상회’라는 태명을 ‘원어데이’로 바꾼 것도 그의 작품이다. 원어데이 제품 섭외 노하우와 판매 일화 등은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제품만 있다면 날개를 달 수 있는 좋은 포맷이다. 한 화면에만 여러 제품이 열려 소비자를 혼란시키는 쇼핑몰 화면은 소비자를 1분 이상 잡아두기 힘들다. 반면 원어데이는 하루에 한 가지만 소개하기 때문에 오래 잡아 두진 못할지라도 집중력을 높일 수 있었다.”
신선한 생각이긴 하나, 업체 입장에서 무조건 반가울 리는 없었다. 원어데이는 광고효과와 함께 저렴한 값에 이용자가 써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이름 없는 회사가 가격을 크게 낮춰달라고 하니 쉽게 응하는 곳이 없었다.
“처음에는 고생이 많았다. 게다가 하루에 한 개씩 올라가야 하니 물건 여러 개를 미리 준비해놔야 했다. 지금은 인지도가 높아져 그때 거절한 업체가 다시 찾아오기도 한다. 우리는 물건의 종류를 가리진 않는다. 첫 상품인 ‘엠피오 MG 100’을 비롯해 놀이동산 이용권, 세안제, 모자, 자전거 등 상품성을 중심으로 본다.”
초반 3개월은 거의 마이너스 상태였다. 하루에 한 두개 나가는 날이 태반이었고 한개도 팔리지 않는 날도 있었다. 도약 발판은 닌텐도가 마련했다. 순식간에 품절되며 원어데이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IT 제품은 가격 경쟁력이 없어 오래 갈 수 없다. 질 좋은 상품 찾기에 몰두하던 중 예상치 못한 ‘세안제’가 대박을 터뜨렸다. 처음엔 300개 팔리던 제품이 다음번엔 3000개, 그 다음엔 2만 개까지 팔렸다. 원어데이가 발견한 ‘보석’인 셈이다.
“중소기업 물건 중에 숨겨진 보석이 많다. 그걸 찾아내는 것도 하나의 역할이다. 우리는 상품을 고를 때 AS 상태를 먼저 확인한다. 그 다음 상품후기, 실제 테스트, 소비자 만족도 순으로 물건을 골랐다.”
숨겨진 보석을 찾기 위해 수많은 제품을 팔았다. 맛 좋은 과일을 찾아 새벽부터 직접 경매 시장으로 가기도 했다. 다음날 값이 올라서 손해 보고 파는 일도 많았지만 제철 과일 찾아 경매 시장을 찾는 발걸음은 여전하다. 호기심 반, 의구심 반이던 이 재밌는 쇼핑몰은 15평 남짓한 물류센터가 250평으로 넓어졌고 직원도 33명으로 늘었다.
내일 어떤 제품이 나올 지는 끝까지 비밀이었다. 품질 좋은 물건을 올린다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신비주의 전략이다. 최근 반값과 공동구매라는 비슷한 형식으로 치고 올라오는 소셜커머스로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도 있다. 이준희 대표는 “소셜커머스는 쿠폰, 우리는 실제 물건이라는 기본 틀 자체가 다르다. 원어데이 서비스에는 영향은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원어데이 갈 길은 소셜 커머스와 다르다. 물건도 더 다양해 질것이고 소비자과 거리도 더욱 좁힐 것이다. 사실 지금도 홈페이지에서 3개의 물건을 팔고 있어 원어데이 이름에 조금 벗어났지만 올해 말 우리의 변신을 보면 왜 그랬는 지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서비스는 밝히지 못하지만 더 나아질 것은 확신한다.”
소품을 활용해 자체 스튜디오에서 직접 촬영해 올리는 제품도 있다.
원어데이 창립멤버 박훈종 이사.
여러 번 생각하면 아이디어가 된다
이준희 대표는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말을 자주한다. 창업 예비생에게도 자주 하는 조언이다.
“먼저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더불어 즐기지 못하면 어떠한 제품이든 어떠한 판매 방식이든 소비자에게 다가 설 수 없다. 창업 아이템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이 세상엔 모든 제품은 만드는 이유가 있다. 만드는 이유만 알면 이 세상에 팔지 못한 물건은 없다. 이 제품을 왜 판매해야 하는지 알면 일단 한 걸음은 뗀 것이다. 쇼핑몰을 창업하고자 한다면 허황된 꿈은 버리는 것이 좋다. 내가 하는 일을 즐길 수 있어야 더 재미난 서비스를 찾게 된다. 한 번 생각할 걸 열 번, 백 번 생각하면 머리가 나빠도 아이디어가 나오게 되어 있다. 아무리 사소하고 유치한 생각이라도 거기에 살을 붙이면 좋은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원어데이 시작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유통채널이 없는 우수한 중소기업을 적극 발굴하는 것이고, 매출액보다 이익을 많이 내는 작지만 강한 기업이다.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원어데이는 첫 화면에 웹 툰, 남은 시간 표시 등으로 집중도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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